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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정 Oct 22. 2021

당신의 시선

단편소설

   

 행복한 가정은 대체로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반드시 고유한 원인으로 불행하다,라고 19세기의 어느 작가는 썼다. 스스로를 환멸 하면서도 색욕과 도박이 주는 희열에 굴복했던 그는 반드시 고유한 원인으로 불행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삶에서   번도 성취하지 못한 대체로 비슷하게 행복한 평범한 가정을 꿈꿨을까.  세기가 지난 지금도  문장은 유효한가. 주위를 둘러보라. 계급이 무너지고 식민지는 해체되었다. 대륙에서 대륙까지 하루 이내에 물리적으로 닿으며 단순한 연락은 1초면 충분한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비슷한 이유로 불행하다. 아니라고? 함께 거리로 나가보자.


 우리는 지금 파란 하늘 아래 주말을 맞이한 명동에 와있다. 언제나처럼 사람으로 북적인다. 선선한 날씨 덕분에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찾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웃고 있다. 엄마 아빠 손을 양손에 잡고 그네를   뜀박질하는 아이는  환하게 웃을까. 노점에서 큼지막한 문어가 박힌 꼬치구이를  먹는 연인은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볼까. 성인용품점에서 광택 있는 라텍스 가죽 목걸이를 사는  여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을까. 아이는 주말에 함께 쇼핑을 나와  부모가 있어 연인은 주말에 함께 나와 서로를 사랑할 시간을 보낼 여유가 있어 행복하다. 여자는 자기 성적 취향을 충족시킬 제품을  능력이 있어 행복하다, 아마도.


 반면, 이토록 푸르른 명동 거리에도 불행한 사람들은 존재한다. 거리를 걷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어느 공간, 어느 자리, 어느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배회한다. 가게에서 내놓은 상자를 구겨 폐지로 만드는 노인의 이마 주름은  깊게 패었나. 영업용 가면을 벗어던진 직원의 눈동자는  공허하게 맴도나. 바닥에 붙은 채로 굼벵이처럼 웅크린 노숙자는. 끓는 기름에 부푼 물집을 손톱으로 잡아 뜯는 청년의 찡그림은. 무슨 이유로, 대체, , 불행한가.


 , 이쯤에서 주인공을 소개하겠다. 환하게 웃던 아이의 손을 따라가 보자.  구운 빵처럼 하얀  손을.  손을 잡은 남자에 주목하라. 그는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를 데리고 주말을 보낸다. 아내나 딸이 원하는  무엇이든 사줄 능력도 갖췄다. 검소한 아내와 착한 딸은 많은  바라지도 않는다. 세상을  가진  행복해 보이는 남자, 최현규. 그는 올해로 서른다섯 살이 되었다. 선한 눈매에 오뚝한 , 소년처럼 웃는 모습은 이십  중반으로 보였다. 규모는 작지만 내실 있는 중소기업을 다니고 주말마다 빼놓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실력을 인정받아 나이에 비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연봉도 높다.  연봉  일부는 꼬박꼬박 십일조로 낸다.


 하나님 아버지, 이번  주도 무사히 마치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덕분에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고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삶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있는  또한 모두 아버지께서 제게 허락해주셨기 때문이겠지요. 항상 감사합니다. 혹여 제가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회개하고 뉘우치겠습니다. 아멘.


 오오,  얼마나 갸륵하고 선한 존재인가. 겸손한 자세까지 가졌다. 그는 교회에선 신실한 신앙인의 표상이자 회사에선 국가 산업을 이끌어가는 참된 일꾼이다.


 최현규가 이토록 착실한 사람이   아내 김연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둘은 필리핀의 어느 한인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최현규는 세상을 배우러 어학연수를 왔고, 김연지는 개척교회를 이끄는 아버지를 따라왔다.  교회 목사가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최현규는  목사에게 그동안 지은 죄를 고백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했을까. 그건 의문이지만 어찌 됐든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사하였다. 그곳에서 최현규는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신을 만났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침대에서 최현규는 이따금 아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동시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은 최현규가  목사와 함께 택시를 타고 교회로 가던 길에 일어났다.  목사는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최현규를 각별히 아꼈다. 게다가 최현규는 침체되어가던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훈훈한 외모에 위트 있는 유머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조금씩 늘어가는 신자 숫자엔 최현규가 일조한 바가 분명히 있었다.  목사는 그런 그를 사윗감으로 내심 점찍어둔 터였다. 둘은 택시 안에서 다음 주말로 예정된 앙헬레스 선교 활동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끔 대다가 돌연 눈빛이 변했다. 최현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총구를 들이밀었다.  내놔. 목소리는 당당했다. 맡겨 놓은 돈을 되찾으러 왔다는 듯이. 돈이 필요하니 돈을 가져간다는 태도였다. 있는 돈을 모두 꺼냈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손엔 총을  손엔 운전대를  택시기사. 차가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다. 최현규는 살려달라고 울며 빌었다.  목사는 침묵했다. 다문 입에 근엄한 주름이 새겨졌다. 서늘한 총구가  목사의 관자놀이에 닿았지만 꿈적도  했다. 그저 주기도문을 작게 암송할 뿐이었다. 택시기사는 소리를 지르다 우발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목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당연히 최현규의 얼굴도 피범벅이 되었다. 나이  목사의 피가 그토록 뜨거울 줄은. 뜨듯하고 비릿한  냄새에 최현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택시기사는 당황한 나머지 방향을 잃고 전봇대에 차를 들이박았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최현규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깊은 바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도 들렸다. 내가 보살피리라.


  목사는 살아났다.  가지 우연이 겹친 덕분이었다. 비틀대는 차를 보고 수상하게 여긴 운전자가 신고를 해준 덕에 경찰이 늦지 않게 도착했다. 응급진료실을 갖춘 병원이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흔들리는  때문에 총탄은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부분을 관통했다. 사람들은 천운이라고 말했다.  목사는 기적이라고 답했다.  목사는 병실을 찾아온 딸과 최현규에게 말했다. 벅차올라 떨리는 목소리로. 그분께서 나를 보살피시겠다 말씀하셨다.  말을 듣자 최현규는 울음을 터뜨렸다. 저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강도를 당한  아니라, 신을 만난 것이었군요. 최현규는 목사의 품에 안겨 울고  울었다.


 머리에 총을 맞고도 살아남은 목사. 필리핀 현지 방송사는 물론 한국 방송사에서도 취재를 다녀갈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언론에게 간택된 교회엔 사람이 몰려들었다. 찾아오는 신도도 크게 늘었다.  목사에게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신의 뜻대로.


 최현규는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목사의 오랜 고향 친구가 경영하는 회사에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필요했고,  목사는  자리에 최현규를 추천했다. 경력은 없었지만 일이야 배우면  . 남자라면 모름지기 회사도 다녀 봐야 한다며  목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권유했다. 최현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귀국했다. 김연지의 손을  잡고서.


 준수한 외모와 쾌활한 성격,  괜찮은 일처리 솜씨, 사장이 친애하는  목사의 후광까지. 하지만 최현규는 자만하지 않았다. 남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양보하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도맡았다. 일에 지쳐 피곤할 만도 하건만. 최현규는 주말마다 김연지와 함께 국내 여행을 떠났다. 해외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내 한국에 대한 추억이 없을 테니 자신과 함께 만들자며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홀로 한국에 와서 외로울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사람은 많은 밤을 함께 보내면서도 선은 넘지 않았다. 종교적 이유로 혼전순결을 지키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을 존중하여.


 그로부터 3 , 그는 회사에서  필요한 인재로 인정받았다. 낙하산이라며 욕하던 동료들도 점차 그를 믿고 따랐다. 눈치가 빠르고 말을 잘해 인기도 많았다. 회식에서도 언제나 1차까지만. 다른 남사원들이 2, 3차에 가며 노래방 도우미는 물론 성매매까지 일삼는  아는 여사원들은 최현규를 선망했다. 저런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데. 하지만 늦었어요, 여러분. 그녀들은 얼마  있어 청첩장을 받았다. 최현규, 김연지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자리에 오셔서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 호텔 예식장의 두툼한 스테이크. 분홍빛 미래를 축하하는 웅성거림.  사람은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첫날밤,  사람에겐 천사가 내려왔다.


 그리고 현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는 일곱 살이 되었다. 회사에서 돌아온 아빠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딸. 세상에서 아빠를 가장 사랑한다는 딸. 최현규는 딸을 위해서라면 모든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도 세상에서 딸을 가장 사랑했으니까. 단 하나만 빼면. 그 단 하나는 바로 김연지였다. 연애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보다 지금 이 순간 더욱더. 퇴근 시간에 맞춰 따뜻한 요리를 준비하는 아내. 회사에서 지친 몸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아내. 최현규는 아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주말이면 아침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다.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숭고한 의식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가족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로 놀러 다녔다. 사람 가득한 명동 거리에서도, 풍광이 아름다운 두물머리에서도, 아이가 좋아하는 키즈카페에서도. 어디를 가도 그들은 행복했다.


 그날이 오기 전 까진.

 그날도 최현규는 김연지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회사로 향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된장을 담뿍 머금은 두부 맛이 좋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최현규는  두부 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구석구석을 깨끗이 양치했는데도 남아 있는  보드랍고 짭조름한 맛을.  맛에 담긴 아내의 사랑을 실감하며. 그래서였을까. 최현규는 사무실에 도착해 메일함을 정리하다 어떤 메일을 봤을  구토감을 느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자신의 삶에 끼얹어진 더러운 티끌에.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누르자  안에 머물던 옅은 두부 맛은 녹이  쇳가루 맛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여보. . 다음  월요일 어떻게 할까요. . 케이크는 당신이  올래요. 케이크, 무슨 케이크. 아름이 생일인  잊었어요. . 무슨  있어요. 잠깐 다른 생각하고 있었어, 회사  때문에, 잊긴  잊어, 선물도 사놨는데, 공주 놀이 세트, 저녁도 바질 페스토로 준비하고, 오랜만에, 케이크도 내가  올게, 요새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정신이 없었네, 미안. 최현규는 횡설수설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김연지는 놀랐지만 이내 수긍했다. 사실  순간 최현규에겐 선물도 케이크도 딸의 생일도 관심 밖이었다. 오전에  메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현규 오빠.  민지야. 라는 제목의 메일. 처음엔 스팸 메일이라 생각하고 휴지통으로 보냈다. 그런 종류의 광고성 메일을 많이 받아  터였다. 클릭하면 야한 속옷을 입은 여자 사진과 함께 외설적인 영어로 지어진 사이트 주소가 나왔다. 색다른 만남을 원하십니까. 당신을 원하는 유부녀가 주변에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는 뻔한 남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뻔한 수법의 광고. 최현규는 그런 광고를 경멸했다.  뻔한 것들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는  대부분 사람들이 뻔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넘어가지 않아.  외에도 사이비 종교를 권유하는 호소문, 특가 세일을 고지하는 알림, 읽을 가치가 없는 뉴스 쪼가리를 삭제하고 업무 관련 메일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휴지통으로 돌아가 스팸 메일 하나를 복원했다. 현규 오빠.  민지야. 그리곤 메일을 열었다. 예상과 달리 사진은 없었고 편지가 쓰여 있었다. 오빠  민지야. 오랜만이지. 요즘 들어 오빠 생각이 나서 연락해 봤어.  그런지 모르겠네.  시절이 가장 행복해서 그런가. 오랜만에 얼굴 보고 이야기해보고 싶어. 만나고 싶으면 아래 주소로 와줘. 돌아오는 일요일 밤에. 메일 하단엔 모텔 이름과 주소가 첨부되었다. 주소를 보니 인적 드문 근교 모텔촌인 듯했다.


 김민지. 최현규는  속으로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아랫니에 닿았다 윗니로 갔던 혀가 다시 아랫니로 돌아오는  이름. 김민지. 그의 첫사랑이자 첫사람. 결국 행복한 결말을 이뤄내지 못한. 떠올리면 안구 뒤쪽이 시큰해지는 그런 사랑. 스팸 메일이 아니었다. 과거의 그림자가 보낸 초대였다. 혼란스러웠다.   가득 쇳내음이 퍼졌다. 이야기를 원할 뿐인가. 아니면  이상을 원하나. 그때 우린  맞았는데.


 대체로 행복한 가정에 불행한 그림자를 드리운 김민지.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녀에 대해 알아보려면 잠시 시계를 앞으로 돌려야 한다. 시계를 돌린다고 실제로 시간이 되돌아가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가 걸어온 인생을 조금이라도 바꿀  없다. 한강에 찾아온 새를 사진에 담는 망원 카메라처럼 멀리서 조망할 뿐이다.  


 대학교에 입학하던 , 김민지는 자신이 언제까지나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리라고 체념했다. 국어책에  등장하는 평범한 이름.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 평소엔 무뚝뚝하지만 술을 마시면 다소 살가워지는 아빠와 잔소리를 빽빽하다가도 맛난 살코기는 양보해주는 엄마, 그리고 맨날 기어오르면서도 부탁은 꼬박꼬박 들어주는   터울 남동생. 평범한 가족. 평범한  싫지만은 않았다. 97 경제위기에 공장이 넘어가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도 손님과 바람이  도망친  행방이 묘연한 미용실 아주머니네 가족도 부모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고아들도 평범한 삶을 원하고 있으리란 사실도 알았다. 공부도 잘했지만 특출 나지는 않았다. 친구는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가수도 남들처럼 동방신기.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행복한 거지. 그러면  거야.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번도 받지 못하며 사는 인생은 죽어서 무얼 남기나, 라는 생각이 종종  때면 마음  구석이    공허해지곤 했다.


 김민지의 체념과 달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그녀는 의외로 주목을 받았다. 그녀가 고향 이름을 말하자 분위기가 술렁였다.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한소끔 달아오른 술자리 분위기는  이름에 특별한 효과를 부여했다. 신입생도 재학생도 추부라는 동네는 처음 들어봤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김추부. 김부추. 춥파춥스까지. 추부에서 파생된 별의별 단어가 술자리를 지배했다. 추부로 연상되는 단어 짓기 게임도 즉석에서 탄생했다. 그녀가 등장하면 누구나 좋아했다. 태어나서 처음 끌어  인기였다. 그녀는 쑥스러웠지만 즐거웠다.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옅게 미소 지었다.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아이돌을 닮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혹은  취하거나 활발하게  노는 동기들에게로 옮아갔다. 추부 이름 짓기 대회 유행은 끝났고 김민지에겐 김추부라는 별명만 남았다.  별명도 머지않아 누구도 부르지 않게 되었지만. 고등학교와 다를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대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추부에선 상상도  했던 화려한 거리. 술을 마음껏 먹는 해방감. 근처 학교 학생들과 하는 미팅. 즐거운 나날엔 주목이나 인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입생  많이 놀아 . 김민지는 선배들이 하는 충고에 따랐다.


   가을, 대학교가 주는 즐거움에도 질려갈 무렵. 김민지는 사랑에 빠진다. 함께 교양 수업을 듣는   연상의 선배. 단정한 옷맵시에 소년처럼 밝게 웃는 미소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이었다. 선배를 보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모두의 시선을  때와는 다른.  따뜻하고  소중한 감정. 선배와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거닐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행복을 전파하는 () 그녀 편이었을까. 조별 과제에서  사람은 같은 조로 배정된다. 교정이 한산 해지는 밤까지 교실에 남아 발표를 준비하고 저녁을 함께 먹으며 일상을 이야기했다. 자연스레 말을 놓고 자연스레  걸음씩 서로에게 다가갔다.  사람 모두  수업에서 성적은 나빴지만 사이는 좋아졌다. 세상을 축복하는 하얀 눈이 쌓이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했다.


 김민지는 남자친구를 위해 난생처음 도시락을  보았고, 밤을 새워가며 편지를 썼고, 야구경기장에서 경기를 관람했다. 행복한 나날들.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남자친구는 김민지에게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속삭였다.  이렇게나 평범한 사람인데.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해.


 그들이 만난  100일이 되던 . 남자친구는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다. 김민지는 주저했다. 가도 될까.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쉽게  주면  . 튕기고  튕겨. 하지만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사랑하는 이가 사는 곳을 보고 싶은 욕망. 그녀는  이기는  수락했다. 난생처음 들어가 보는 다른 남자의 . 향긋한 냄새가 의외였다. 그가 그날을 위해 구석구석 향초를 피워 놓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남자친구가 준비한 요리. 바질 페스토. 그녀에겐 생소한 이름의 파스타를 그는 능숙하고 멋들어지게 발음했다. 바질 페스토. 그녀는 남자친구를 따라서  이름을 소심하게 읊조렸다. 모든   되도록 만드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 듯이. 거기에 곁들여진 와인  ,  ,  잔은 김민지를 유혹에 무방비하도록 만들었다. 그날 , 라벤더 향초와 바질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김민지는 처음으로 남자를 받아들였다.


 다음  기숙사로 돌아가는 김민지에겐 여러 가지가 남아 있었다. 입술에 닿던 남자친구의 따사롭던 숨결, 가슴을 주무르던 거친 손바닥, 아랫배보다 아래에 자리한 뭉근한 통증.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나 마음을 식히는 서늘한 바람. 너무 빨리 허락한  아닐까. 나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길한 상상들. 바질 페스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되뇌었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바질 페스토.


 그날 이후,  사람의 데이트는 언제나 같은 곳에서 끝났다. 남자친구의 . 방을 가득 채우던 향기가 사라진.  만든 요리의 따스함이 아닌 전자레인지에 데운 뜨거움만이 남은. 신을 모시기 위한 성스러운 의식처럼 천천히 공들여 진행된 처음과 달리 관계를 갖는 시간도 점점 빨라졌다. 남자친구는 김민지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페이스에 맞춰 허리를 흔들고 사정을 하고 만족했다.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자리.  누구보다도 가까이 닿은 살결.  존재하지 않는 듯한 오롯이 서로에게 몰입하던 순간.  순간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추부라는 별명과 함께 찾아온 인기보단 느리게. 그때 느낀 상실과는 비교할  없이 아프게. 남자친구는 그녀와 몸을 섞는 와중에 하품을 섞어가며 노골적으로 지루하다는  드러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지루함을 잊기 위해 그녀에게 일탈을 요구했다. 새로운 체위를 시도하거나 구멍이 숭숭 뚫린 야한 의상을 가져오거나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한 형태를 가진 도구를 가져오거나. 김민지는 거절하고 싶었으나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무엇보다 두려웠다. 남자친구 얼굴에 떠오른 지루한 표정이. 점점 옅어져 가는 그녀를 향한 애정이. 결국 행복한 결말을 이뤄내지 못한 그들의 사랑이.


 사랑해서 그래. 그녀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가  하던 . 사랑해서 그런 거야. 끝내 요구를 받아들이고 집으로 가며 스스로에게  던지던 기만.


 어느  그는 사랑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자고 제안했다.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서. 걔네도 찍었다더라. 자기가 나오는 영상 보면서 하면 되게 야릇한 기분이래.  번만. 제발. . 사랑해서 그래.  좆같은 매직 워드.


 김민지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찍는다는 조건으로 촬영을 수락했다.

 김민지는 훗날 후회하고 원망했다. 이미 돌아가 버린 시계를 되감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으며.

 남자친구 휴대폰에  영상이 저장되어 있다는  알았을  김민지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보라. 이게  오빠 폰에 있어. 사랑해서 그래. 미쳤어. 사랑해서 그래, 언제든 보고 싶어서. 당장 지워. 김민지는 난생처음으로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미친 사람처럼. 누가  모습을 봤으면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간 내내 울고 때리고 애원해서야 남자친구는 영상을 삭제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김민지는 무언가를 자각했다. 전보다 남자친구를 조금  사랑하게 되었다고.  사람 사이에 싸움이 잦아졌다. 여느 불행한 커플과 다를  없이 비슷한 이유로. 이제 김민지도 남자친구에게 화를   있었다. 그가 하는 과도한 요구를 거절할  있었다. 전보다 그를  사랑한 덕분에. 사소한 일로 다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모든 순간을 공유하지 않던 나날들. 격해진 말다툼 끝에 남자친구가 김민지의 뺨을 때린 , 그녀는 헤어지자고 말했다.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남자친구는 김민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그는 그녀를 놓지 못했다. 매일 밤마다 전화를 걸어 울며 애원하고 모두가 잠든 새벽 기숙사에 찾아와 울며 소리치고 강의실 앞에서 무릎 꿇고 울며 기다렸다. 돌아오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사랑해서 그런다고. 김민지는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그를 거부했다. 밤마다 이불을 적시고  적시면서.


 문자  통이 어느 새벽녘 김민지에게 도착했다. 그녀가 잊을  없는  시각. 새벽 3 38. MMS. 대용량 문자 메시지. 수신하시겠습니까. . 그녀는 휴대폰을 던졌다. 잠에서   시린 눈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딱딱한 기숙사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에선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적 탓인지 과장되게 울려 퍼지는. 누가 만드는 소음인지 그녀는 식별할  있는. 김민지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하는 거야, 지금, 미쳤어, 이게  아직도 너한테 있어, 당장 지워, 아니면 찾아가서 죽여 버릴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을까. 속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형태도 소리도 갖추지 못한  목구멍으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김민지. 돌아와. 사랑한다.   없으면    같아서 이런다. 제발. 내가 나쁜 마음  먹게  주라. . 민지야. 내가  진짜 사랑해서 그래. 사랑해서. 수화기에선  취한 목소리가 두서없이 이어졌다.  다시  받아 주면  이거 인터넷에  뿌리고 자살할 거야. 농담 아니야. . 다른 남자랑 니가 이짓거리하는   참겠다고.


 그가 제멋대로 떠드는 동안 그녀  속엔 바싹 마른 솜뭉치가 계속 자라나고 있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아무 말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위에서 뜨거운 뭔가가 솟구쳐왔다. 그녀는  뜨거운 뭔가를 침대에 토했다. 하지만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고,  의식을 잃었다.


 언제까지나 평범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오기 전까진.

 김민지의 삶은 바뀌었다. 태어난 고향 덕에 받던 관심에 비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관심을 받았다. A대학교 B학과 김민지. 그녀가 새롭게 얻은 이름이었다. 그녀와 스쳐 지나간 적도 없는 이도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보았다. 그녀를 평가하고. 그녀를 상상하고. 그녀를 욕하고. 그녀를 단죄했다.

 그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그가 모든 연락을 끊고 군대에 들어갔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괜찮아, 민지야. 누구나 하는 건데 . 인생 끝난  아니잖아. 화질이 구려서   줄도 모르겠더라. 값싼 위로들. 아니 김민지에겐 값싸게 들린 위로들.

수수하게 다니더니 반전 매력 최고. 완전 섹시해요. 민지야, 오빠는 침대에서 희생적인 여자가 좋더라, 너처럼. 저도  번만 해주시면  될까요. 익명의 쪽지를 통해. 뻔뻔스럽게 식사하던 중에도. 그녀에게 닿는 조롱들. 그건 조롱이었을까. 아니면 진심이었을까.


 눈사태처럼 김민지를 덮친 시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동영상이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퇴했다.

 김민지는 기숙사에서 나와 단칸방을 구하고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만두었지만. 그녀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 모두가 자신을 알고 모두가 자신을 조롱하고 모두가 자신을 욕망하는  같았다. 민지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싫었다. 그녀는 점점 고립되었고 점점 공격적으로 변했다. 대화할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얼굴을 가리지 않고 외출하기가 무서웠다. 가뜩이나 인간관계가 넓지 않았던 김민지. 누구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평범한 숫자의 친구들. 김민지가 겪은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려 노력하던 친구들도 마음을 굳게 닫고 혼자만의 구덩이로 숨어 버린 그녀를 기약 없이 기다려 주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동영상은 암세포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퍼졌다.


 부모님에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부모님은 김민지가 대학교 입학이 확정되던 , 경사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돌렸다. 수험을 앞둔 동생에게도 누나 반만큼만 하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누나는 원래 잘하잖아. 동생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이내 뒤돌아 살짝 웃는 모습엔 누나를 향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그런 가족에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그들에게, 자퇴했다는 소식을 알린다면. 자퇴한 이유를 밝혀야 한다면. 그녀는 매일  지진으로 견고한 ()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니 돈이 부족했다. 다달이 받는 용돈으로 월세에 생활비까지 감당하긴 어려웠다. 결국 김민지는 마전행 버스표를 끊었다. 추부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아무도 모를 거야. 공무원 시험 보고 조용히 살면 돼.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자퇴서가 수리되어 되돌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엄마는 미쳤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베란다에 나가 담배만 뻑뻑 피웠다. 동생은  다른 말하지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었다.


 김민지는 진실을 털어놓을까, 고민했다. 엄마 아빠. 딸이 발가벗고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세계를 퍼지고 있어. 경찰에게 신고해도 변하는  없더라. 동영상이 올라간 사이트가 한두 개가 아니거든. 계속 늘어가고 있고 그중엔 외국을 기반하는 곳도 있어서.  찾을  없대.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찾는  불가능하고. 엄마 아빠  이제 어떡해.

 입은 열려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목소리가 사라져 버릴까.


 독서실에 간다고 나갔던 동생이 병원에서 발견된 그날. 모든  밝혀졌다. A대학 B학과 김민지는 추부에도 닿아 있었다. 이거 혹시 너네 누나 아니냐. IT 시대를 선도하겠다며 전국적으로 설치된 멀티미디어실 대형 스크린 화면은 종종 소년들의 성적 배출구로 기능했다. 화질은 거칠었지만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누나였다. 커다란 화면 속에서 확대되어 거인처럼 보이는. 여태껏 살며 들어 보지 못한 음조를 내뱉는. 착하고 성실한. 가족의 자랑. 우리 누나. 동생은 말을  친구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쳤다. 대형 스크린을 움켜쥐고 끌어내렸다. 찢어진 스크린이 바닥에 떨어졌다. 프로젝터에서 나온 빛은 벽에 반사되었고 스피커에선 여전히 익숙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동생은 컴퓨터를 들어 바닥에 던졌다. 하지만 박살  기계장치와 달리 영상은 남았다.  후로 따돌림이 시작됐다. 누나가  팔아서  많을 테니 과자를  오라고 했다. 누나랑   해보고 싶으니 번호를 달라고 했다. 누나도 했는데 너가 못할  뭐냐고 옷을 벗기고 영상으로 찍으며 낄낄거렸다. 동생이 저항하면 얌전해질 때까지 때렸다. 그리고 별명을 지었다. 걸레 동생.


 동생은 부모님께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누나를 좋아했으니까. 누가 뭐래도 자상하고 똑똑한 우리 누나니까. 조금만 버티면 되겠지. 금방 졸업이야. 예상보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폭력은 더욱 집요하고 더욱 잔혹해졌다. 조금만 버티려던 동생은 조금만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서. 동생이 자살한 이유는 경찰이 발견한 일기장을 통해 드러났다. 폭력의 발단, 전개, 결말.  시작엔 A대학 B학과 김민지가 있었다.


 장례식은 끝났다. 짧고 간략한 절차였다. 골분(骨粉) 서대산에 뿌렸다. 동생을 괴롭힌 아이들은 처벌을 받았다. 저지른 죄에 비해 미약한 처분이었다. 그들은 후회하고 뉘우쳤다고 말했다.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민지 가족은 주변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추부를 떠났다. 김민지는 가족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다. 흘릴  있는 눈물을 모두 흘렸기 때문일까.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남들 시선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찍은  다른 영상이 매일매일 새롭게 올라왔기에. 김민지는 악착 같이 돈을 모았다. 편의점, 술집 주방 보조, 텔레마케터까지. 일주일에 60시간가량 일했다. 휴일도 없었다. 그중 반은 부모님께 송금했고 반의 반은 생활비로 나머지는 모두 저축했다. 언젠가 김민지가 평범하던 시절, 평범한 친구들이 평범한 꿈을 말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있어. 이제는 돌아갈  없는 평범한  시절. 김민지는 돈이 쌓여가는 통장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니 돈만으로는 부족해. 그리고 그녀에겐 새로운 수집 취미가 생겼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수갑. 두껍고  핑크빛 딜도. 라텍스 가죽 목걸이.


 다시 시계를 감아 현재로 돌아오자. 급박해 보이는 손동작으로 택시를 잡는 최현규를 놓쳐선  되니까. 그는 메일에 적힌 주소를 기사에게 건넸다. 자가용이 있지만 택시를 탔다. CCTV 차번호가 찍힐지 몰라서였다. 휴대폰도 회사에 두고 왔다. 정확한 GPS 그의 위치를 추적하는  싫었다. 그는 그저 옛사랑과 추억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과정에 흔적을 남겨 필요 없는 분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도착한 곳은 예상보다 한적했다. 택시기사가 태울 손님도 없고 돌아가는 길도 길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모텔도 무인으로 운영 중이었다. 최현규는 메일에 적힌 객실을 찾아 계단을 올랐다. 꿉꿉한 냄새가 가득한 복도엔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가 흘렀다. 정체 모를 흥분감이 배어 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려나. 어쩌면.  이상도 가능할지 몰라.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입과 코를 막은 걸레. 시큼한 냄새. 최현규는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떴을 ,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구가 건조해 시야가 흐릿했다. 싸구려 침대, 조악한 텔레비전, 먼지 더께 쌓인 커튼.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손목과 발목이 밧줄로 단단히 묶였고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다. 신체 아랫부분에서 관통당한 듯한 이질적인 감각이 기분 나쁘게 올라왔다. 쌀쌀한 공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얼굴도 묶여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아래를 보니 알몸이었다.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메마른 목에서 꺽꺽 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납치당한 걸까. 스팸 메일 따위 열어보는  아니었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대체 내게  이러는 거야. 대체 누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들은 지 오래된. 낯설지는 않은. 담담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오랜만이야, 최현규 씨. 행복해 보이더라. 나는 그날 이후로 지옥을 살아가는데.

 너 민지니. 메일 보낸 게 너야. 나한테 왜 이래.

 사랑해서 그래.

 뭐.

 사랑해서 그런다고.

 장난치지마. 빨리 이거 풀어. 경찰엔 신고 안 할게.

 신고하고 싶으면 . 그전에 이거나 한번 .


 김민지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낡은 기계에서 혼탁한 전자음이 흘러나왔다. 텔레비전엔 컴퓨터 바탕화면이 보였다. 커서가 움직이고 최현규라는 동영상 파일 더블 클릭. 창을 가득 메우는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 재생되는 영상은 조명이 없어 어두운 방을 보여주었다. 화면  방은 그들이 현재 있는 방과 닮았다. 아니 같은 방이었다. 광각으로  전체를 조망하던 카메라는 서서히 피사체를 향해 다가갔다. 침대 한가운데 묶여 있는 피사체. 발가벗겨진 채로 ()자로 팔과 다리를 포박당한 최현규. 그는 뜬금없게도 영상에서 보이는 자신의 몸이 그토록 쇠락했다는 사실에 우선적으로 놀랐다. 여전히 젊다고 생각했는데. 영상  그는 살이 늘어지고 피부는 푸석한 삼십  중반의 남자였다.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 실시간이 아니었다. 현재 자신은 혼자인데 영상에선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검정 재킷과 검정 슬랙스와 검정 구두를 신은 토끼 마스크를  누군가가.


 어. 어. 지금 뭐 하는 거야. 최현규는 경악했다. 일그러지는 미간. 영원히 펴지지 않을 듯이.

 토끼 마스크는 손에  거대한 핑크빛 딜도를 최현규 몸속에 삽입했다.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정신이 혼미한 최현규는 고통스러운지 즐거운지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모습. 그는 영상  자신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분명 불쾌하고 역겨웠을  같은데. 영상으로 보니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위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엔 진짜였다. 얼굴이 토사물로 뒤덮였다. 오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몸에서 이런 악취가 나오다니. 영상은 계속되었다. 영상  최현규는 몸을 뒤틀었다. 참을  없다는 듯이.


 그는 무얼 참을 수 없었을까. 통증을, 쾌락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신이 만든 과거를.

나한테  이러는데. 최현규는 울었다. 아내 앞에서  번도 흘려본  없는 눈물.  앞에서 울어보는  얼마 만이었던가. 수치와 창피를 무릅쓰고 그는 울고  울었다. 신을 만났던 그날  목사에게 안겨 울던 것처럼.


 최현규 씨가 여기 왔으니까. 아내와 딸을 배신하고 여기에 왔잖아. 그러니  받는 거야.

그게 왜 잘못이야. 오랜만에 너와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그뿐이야. 제발. 나한테 이러지마.

여전해, 최현규 씨는.  자기 생각만 하는구나. 나도 그래. 최현규 씨를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그런데 그럴 마음이 사라졌네. 안녕.


 김민지는 미련 없이 떠난다. 동영상은 멈추지 않는다. 영상 속 토끼 마스크는 쉬지 않고 딜도를 움직이고 최현규는 거기에 맞춰 몸을 뒤튼다. 언젠가 청소부에게 최현규는 구조될 것이다. 최현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음 주 월요일엔 공주 놀이 세트와 케이크를 사고 바질 페스토로 맛을 낸 파스타로 가족을 기쁘게 하겠지.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최아름, 생일 축하합니다. 세 사람은 행복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대체로 비슷하게 행복한 가정의 표본. 해피엔딩. 딴딴 따 단. 최현규는 앞으로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못할 것이다. 매일 매시간 성인사이트 동영상 업로드 목록을 살펴야 할 테니까. 아내가 딸이 장인이 친구들이 영상 속에서 몸을 뒤트는 자신을 먼저 발견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그는 신께 기도드린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해악이 제 인생으로 돌아오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최현규가 보여준 태도가 이상한가. 사실 영상을 퍼뜨린 건 그가 아니다. 술에 취해 전화를 걸었던 새벽 최현규는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영상을 퍼뜨린 건 휴대폰을 습득했던 고등학생. 자신이 단초를 제공했지만 직접 퍼뜨렸다는 죄책감이 그에겐 없다. 게다가 그는 김민지가 겪은 고통을 모른다. 군대로 도망쳤고 필리핀으로 달아났으니까. 40kg에 육박하는 군장을 매고, 선임에게 욕먹고, 후임을 괴롭히고, 위문공연에 열광하고, 자신에게 닥친 일을 소화하느라 김민지는 잊혔다. 옛 연인일 뿐으로. 필리핀에서 죄를 신께 고해하고 구원받았다. 그는 새롭게 태어났다. 신께서 과거의 죄를 모두 사하여주셨다. 그는 여전히 생각한다.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고.

 그 누구도 잘못을 하지 않은 거라면. 도대체 잘못은 누가 한 걸까. 끝없는 전쟁과 끝없는 평화 사이에서. 잘못을 저지른 자는 누구인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는 알지도. 누군가는 알고 싶지 않을지도.




                                                                                임해원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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