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깊은 밤 잠은 안 오고

by 박엘리

그날은 최근 몇 년, 혹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숨 막힌 날로 기억됩니다. 그 날에이어 그 밤까지도 말입니다. 송파집을 매수와 기존집 매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쌍방계약의 날이었습니다. 내가 사고 싶은 집이 있으니 내 집을 팔아야 했고, 내가 팔고자 했더니 누군가 내 집을 산다고 합니다.





1. 매도매수 동시진행

토요일 낮 12시에 집을 보러 와서 조용히 둘러보시던 우리 집 매수자분은 1~20분 후 바로 계약을 할 테니 계좌를 달라고 합니다. 그 소식을 시작으로 저도 매수할 부동산에 우리 집을 계약한다고 하니 거기도 계좌를 받아달라 했습니다.


저희를 중심으로 매도매수가 동시진행되면서 총 4 가구, 3곳의 부동산, 총 12명이 7시간 동안 이 계약에 오롯이 집중하였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7시간에 걸쳐 매도매수 계약내용이 최종 합의되어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부동산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 지친 몸을 끌고 우리 부부는 침대에 걸터앉았습니다. 매도매수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서 고갈이 될 만큼 힘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신이 우리를 도운 거 아닐까? 이렇게까지 한 번에 계약이 된다고? 이건 마치 누군가 우리를 멱살잡이 해서라도 이 계약을 하게 도운건 아닐까? 복잡한 생각이 밀려옵니다.


2. AI에게 물어봐

뺨 한 대를 맞는다 해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우리 부부는 몸과 마음 모두 얼얼했습니다. 하루 만에 집을 보고 하루 만에 집을 팔고 하루 만에 집을 산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정신이 아득해져 옴을 느낍니다.


마침 유료버전 AI를 사용하고 있는 남편에게 AI는 뭐라고 얘기해?라고 물어보니, AI도 갈아타기 괜찮다고 답한다면서 AI의 답변 내용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뿔싸! 그런데 매수할 아파트의 주소지가 다른 주소지임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어? 여긴 그 아파트가 아닌데? 우린 000동이잖아?


남편의 흔들리는 동공이 제 마음을 더욱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남편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남편 마음에 흐르는 눈물 같아 보였습니다. 남편은 AI와 무슨 대화를 했던 걸까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습니다.


3. 밥이 밥이 아니고

일단 아이들 저녁을 챙겨야 했기에 간단히 차려주고 넷이 식탁에 앉았습니다. 밥이 넘어가질 않습니다. 물도 넘어가질 않습니다. 온몸이 멈춘 듯 먹히지도 마셔지지도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거의 먹지 못했는데도 배가 고프지가 않습니다. 긴장 버튼이 눌리면 놀라울 정도로 입맛이 사라지나 봅니다.


4. 일단 누워서 생각하자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몸이 뻐근하였습니다. 남편도 나도 둘 다 마치 어른들 몰래 큰 일을 저지르고 사고 친 아이처럼 눈알만 굴릴 뿐 멍해졌습니다. 누워서 오늘의 일들을 다시 복기해 봅니다. 이 집을 팔고 저 집을 사는 것이 맞는 일일까? 더 잘한 일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생각이 생각을 불러옵니다.


- 이사를 가는 것이 맞을까?

- 이사가 지금 가는 게 맞을까?

- 이 집을 꼭 팔아야 했을까?

- 신축인데 여기 살기 너무 좋은데?

- 애들은 안 간다고 하면 어쩌지?

- 이 집이 나중에 더 오를 거 같은데?

- 저 집이 나중에 안 팔리면 어떡하지?

- 저 집을 괜히 산다고 한 건가?

- 돈은 어떻게 하지?

- 여기가 더 괜찮은 거 같은데?

- 그냥 계약 파기 할까?

- 계약금 5,000만원 받았으니 배액배상 1억?

- 계약금 5,000만원 보냈으니 그럼 1억5천??

- 1억 5천만원 손해보고 계약을 파기할까?

- 그렇게까진 아니겠지?

- 일단 가볼까?

- 아이고 머리야..

- 너무 빨리 결정한 거 같은데

- 내가 너무 서둘렀나

- 내가 너무 더 알아보지도 않았었나

- 내가 너무 꽂혀 있었나


5. 깊은 밤 잠은 안 오고

긴긴밤 잠을 못 잤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걱정의 보따리를 한껏 부풀려주고 있었으니까요. 휴대폰을 잡았다 내려놨다,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바로 누웠다가 돌아누웠다가 하면서 깊은 밤 홀로 외로운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큰 결정을 양가부모님께 여쭤보지 않고 결정해도 될까? 언니한테 물어볼걸, 형님한테 물어볼걸, 친구한테 물어볼걸 하다 이내 계약금은 이미 송금완료되었다는 팩트만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물은 엎질러졌으니 이제 잘 닦는 일 밖에는 없었습니다. 계약 파기를 하기에는 1억 5천이라는 돈이 너무 컸고, 그대로 가자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 걱정에도 약간의 희망과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서울로 이사 간다는 그 사실이, 평수 넓어진 1층 집에서 잘 살아보자는 체념도 함께 들었습니다.


6. 집에 가보자!

잠 한숨 못 자고 일어난 일요일, 남편과 아이들과 같이 드라이브로 새로 이사 갈 아파트로 향했습니다. 반짝반짝 밤에 봤던 그 분위기와는 또 달랐습니다. 주차를 하고 내려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여기저기 낡고 허름해진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아빠 우리 여기로 이사 오는 거야? 여기 아파트는 좀 오래돼 보이는데? 나는 지금 우리 집이 더 좋단 말이야! 여기 아파트로 이사는 절대 노야! 절대 노!


가슴을 후벼파는 아이들의 말이 우리 부부의 시름을 더 깊게 했습니다. 아이들과 상의 없이 진행된 계약이어서 아이들을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새로운 동네, 낯선 공간에 이사 와서 전학까지 하게 될 아이들을 보며 책임감이 더 커졌습니다.




계약은 했습니다. 계약을 했기에 돌이 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제 새롭게 밟게 될 땅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그림을 찬찬히 그려봐야 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계약 후 약정서 작성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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