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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오 Nov 12. 2023

작은 이야기들의 소중함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 허찬욱

 대구카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허찬욱 신부님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지방 출장 중에 KTX에서 읽으려고 가볍게 집어 들었는데, 글의 깊이가 너무 깊고 울림도 크고 뭔가 잔잔하면서도 그간 고민하거나 고쳐야 할 것들,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나에게 주는 질책도 있는 것 같았다. 쉬운 말로, 쉽게 써내려 가셨지만 결코 글의 깊이가 얕거나 가벼운 내용은 아니었다.


 마치 주일 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을 듣는 듯, 한편으로는 깨달음을 주고 있는 내용도 있고, 또 그간 얼마나 어줍잖은 나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더 가슴 아프게 했는지, 편협한 지식으로 내가 마치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교만하게 굴었는지 당장에라도 고해 성사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나에게 깊은 ‘울림’을 가져다 줬다.


 신부님은 잔잔하고 덤덤하게 (그렇다고 공감이 없이 관조적이지 않은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덤덤함) 때로는 날카롭게 슬픔과 애도를 중심으로 글을 써내려 가셨다.


 나 또한 청년시절 거대 담론, 큰 이야기, 큰 당위성 등에 천착한 채 정작 큰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들은 거의 무시했었다. 지금 당장 이게 급한데, 그런 하찮고 사소한 것에 신경쓸 겨를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마치 그런 작은 이야기들이 큰 이야기의 진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인양 귀찮게 취급했던 적이 많았음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닥쳐온 슬픔과 불행에 대해 진정으로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이해해 보려고 했는지, 진정 그 사람의 마음도 모른 채 어줍잖은 위로를 던져놓고 ‘내 할 바는 다했다’고 했던 무책임하고 철없던 나의 말과 행동들이 자꾸 겹쳐진다.

 실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기 보다는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 섣부른 위로를 던졌던 것이고, 진정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속마음 따위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힘들다는 사람에게 위로를 던지는 나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부끄러워진다.


 미사의 첫 시작인 참회기도에도 나오고 매일의 고백기도에도 항상 제일 먼저 나오는 부분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반성'이다. 나의 반성과 그에 따른 진정한 성찰이 바탕이 돼야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도 좀더 밀착돼서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 의미를 곱씹어 본다.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


 신부님의 책을 읽으며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내가, 오늘보다는 더 나아지는 내일의 나가 될 수 있기를 인격적으로 성숙해지기를 희망해 보고, 그렇게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고 실천해 보고자 한다.


 유독 가슴에 깊이 다가왔던 문장들을 다시 떠올리며, 말뿐이 아닌 하나씩이라도 행동과 실천으로 행하는 나의 내일을 그려본다.


 ‘너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공감의 말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려면, 타인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조심스레’ 물어야 합니다. 타인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어떤지 ‘섬세하게’ 봐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원래 그런 슬픔’은 없는 거니까요.


 약하고 섬세한 존재들, 그래서 다른 존재들과의 조화를 위해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움츠릴 줄 아는 존재들만이 슬프지만 아름답습니다. “예쁜 것과 약한 것, 그리고 슬픈 것은 거의 같은 것은 아닐까.” 하고 말합니다.


 희망은 여지없이 절망이 되고, 절망은 우리가 다시 희망을 찾을 이유가 됩니다.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고,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지요. 희망과 절망은 같은 순간, 같은 곳에서 서로를 단단히 붙들고 있습니다.


 희망은 삶의 비참함에 눈감지 않으며, 삶의 비루함에 무릎 꿇지 않으려는 결연한 다짐 같은 것입니다. 절망을 모르는 희망은 그래서 희망이 아니지요. 아무것도 쥘 것이 남아 있지 않는 절망의 순간, 역설적으로 남은 것이 희망밖에 없어서 붙잡는 희망입니다.


 세상이 조금씩 나아진다면, 그것은 큰 이야기가 모든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 아니라, 큰 이야기에 함몰되지 않으며 힘겹게 버티는 작은 이야기들의 분투가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연대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꾸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억은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도구입니다. 타인의 상처를 기억하는 일에 지쳐서는 안 됩니다. 상처를 기억하는 일은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력에 결연히 맞서는 일이 될 테니까요.


 우리는 사람의 앞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읽어 냅니다. 겉 모습을 보고,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안다고 믿어 버립니다. 알아야 할 것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대상 앞에서, 애써 겸손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마주한 사람에게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외운 대로 말하지 않고, 사람의 말부터 곰곰이 들으면 좋겠습니다. 곰곰이 들어 본 후에 생각해도, 다 들은 후에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빨리 판단하고 선과 악을 선명히 가르는 것이 신앙 언어의 본령은 아닐 것입니다. 남의 말을 천천히 듣고, 말할 때는 충분히 고민한 후에 겸손하게 말길을 찾아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말하는 방식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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