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보며 오늘 조금 더 파리지앵이 되었다

: 우리 대치동 대신 파리나 갈까?

by BOX


어제 잠깐 빛나던 파리는 오늘 어김없이 겨울비가 내립니다. 여행자의 하루인지라 느지막이 아침잠에서 깨어납니다. 아침거리를 준비하려 동네 마트와 빵집에 들러 찬거리를 사 왔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파리에서 먹는 바게트만큼은 세상 어느 빵 보다도 맛있습니다. 장바구니에 대파와 커다란 바게트를 담아 옵니다. 오늘 조금은 더 파리지앵이 되어갑니다.


오늘은 특별히 무엇을 할지 어딘가에 갈지 정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 3세 다리와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앵발리드,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 세상 어느 곳보다 많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중 마음 가는 곳으로 가려합니다




마침 비가 내리니 마음은 모네의 편을 들었습니다. 12시가 돼서야 집을 나섭니다. 지하철 RER B와 C를 번갈아 타면 블라비에 역에 내립니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은 불로뉴 숲에 면해있는 파리의 대표적 부촌인 파리 16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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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비가 내립니다. 16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조용합니다


인적 드문 깨끗한 거리에 겨울비가 내립니다. 걷다 보면 깨끗한 주택 사이 가로수에 둘러싸인 널찍한 공원이 나옵니다. 하늘라그 공원입니다. 도로 한쪽을 막아 놓은 한적한 공터에 꼬마 친구들이 뛰어놉니다.


공원과 볼로뉴 숲에 면해 있는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은 파리에 있는 모든 미술관 중 가장 한적하고 여유롭고 조용한 미술관입니다. 모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5년 전과는 달리 베르트 모리조의 특별 전으로 전시 작품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좋아하는 몇몇 작품을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다행히 모리조의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 그 아쉬움을 달랩니다.


모리조는 인상주의 화가 중 유일한 여성입니다. 마네의 제부이며 드가, 르누아르, 모네 등과도 가까이하며 많은 친분을 나눴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그림만큼이나 외모 또한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리조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만큼의 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여자인 탓입니다.


모리조는 로코코의 대가 프라고나르의 증손녀입니다. 그의 유전자를 받아서인지 뛰어난 재능의 그녀는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에두아르 마네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출중한 외모와 명문 집안의 배경은 마네의 관심을 끌고 그의 모델이 되게 됩니다. 마네의 제자이자 뮤즈. 서로 썸 타기를 여러번였지만 불행히도 마네는 유부남였고 당시 유부남과의 스캔들은 명문가 모리조 집안에는 큰 문제기도 했습니다.


모리조를 바라보는 외젠 모네


결국 모리조는 사랑하는 마네의 남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하며 평생 그의 주변에 머물게 됩니다. 이를 몰랐을 리 없는 동생 외젠은 모리조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으로 그녀의 뒤에서 평생 뒷바라지를 합니다. 형을 사랑하는 아내, 아내를 사랑하는 자신의 일방통행 슬픔이 묻어있는 그림이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늘 그녀의 뒤에서 그녀만 바라보며 해바라기를 했을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모리조는 여성 유일의 인상파 화가였고 그림을 400점 넘게 남긴 위대한 화가였지만, 그녀가 죽었을 때 사망증명서에는 직업이 무직으로 적혔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요. 딸 가진 입장에서 기분이 썩 좋지 못합니다.



지하로 내려가 모네의 작품을 봅니다. 이 미술관은 전 세계에서 모네의 컬렉션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인상주의'라는 말을 탄생시킨 <인상, 해돋이>가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인상주의, 인상파라는 미술사조와 이름으로 불리게 한 최초의 그림입니다.


인상, 해돋이... 참 인상적입니다.


모네가 자신의 고향인 항구도시 르아브르를 그린 그림입니다. 자욱한 안개 뒤로 태양이 떠오릅니다. 항구의 희미한 실루엣, 수면에 비친 붉은 잔상과 떠다니는 배. 대충 물감을 뒤섞어 붓질을 한 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인상, 해돋이라... 감동적이구만, 인상적이네. 가관이야. 그림 뒤 벽지가 차라리 낫네 그려’ 평론가 루이 르로이는 즉각 조롱 섞인 비평은 내놓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미술사조는 이런 비아냥에서 출발합니다. ‘번들거리기만 한 찌그러진 진주’ 바로크, ‘천박한 조개껍데기’ 로코코, ‘애들 장난감 같은’ 큐비즘, ‘기성품’ 레디메이드가 그렇습니다. B급이 그 출발점인 것이죠. 이런 조롱이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되었고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뒤로 물러나서 조용히 그림을 보고 있자니 르아브르 항구.. 너머 붉은 태양이 물결에 아른거리며 떠오릅니다. 항구를 빠져나오는 작은 배들과... 어부들.. 그들이 시작하게 될 어쩌면 고된 하루... 혹은 선물 같은 하루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렇습니다. 참 인상적이에요.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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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모네의 작품을 혼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사실 모네 작품의 감동은 오랑주리 미술관이 제일입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모네의 작품을 정말 조용히 온전히 혼자서 즐길 수 있습니다. 미술관은 한적합니다. 수련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P.S.


격하게 여유로운 파리에서의 하루였습니다.

마르모탕 미술관에는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거리>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원래 작품은 시카고 미술관에 있는데, 아마 이건 습작인 듯합니다.


이 보다 비 오는 파리를 잘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요?

비 오는 거리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남녀..


그들과 스쳐 듯 지나가는 한 신사

도로의 가로등...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비에 젖은 도로와 건물...


스냅사진의 한 장면 같은 한 순간


도시 파리가 그대로 이듯 몇 해 전 이곳에서 본 그림과 오늘의 그림이 그대로 나를 반겨줍니다. 오늘같은 비 오는 날 제격인 그림입니다.


2024년 1월 24일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파리의 하루 BOX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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