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깎이로 AI 방어하기

by BOX


혹시 당신은 기억하시는지?


기억나는가? 연필로 글을 써본지가 대체 언제인가? 우리는 이미 컴퓨터 키보드와 스마트폰 자판이 익숙하다. 이제 우리는 창과 활을 다듬으며 수십만 년 호모사피엔스의 손가락 신경에 도도히 전해 내려오던 DNA를 잊어버린 채 엄지 손가락만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맞다. 이게 다 AI의 못돼 먹은 계략이다. 인류가 연필 사용법을 잊게 만들어 먼 훗날, 손가락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기억해 보자. 연필로 편지를 쓴 적이 언제였던가? 그림을 그려본 적은? 시를 쓴 적은? 연필을 깎아본 적은? 연필로 카세트페이프를 돌려본 적은?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今度は今度, 今は今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아주 조용한 영화다. 그렇다. 영화 속 주인공은 영화 시작 30분이 다 돼서야 겨우 입을 뗀다. 그마저도 말 수가 적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다. 그는 중년의 독거남이다. 그의 일상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커피를 마시고, 청소차를 몰아 화장실을 청소하고, 일과를 마친 후 목욕을 하고 책을 읽고 카세트테이프 음악을 듣는다. 영화는 이 일상의 반복이다. 지루할 정도다. 한데 이상하다. 그 아날로그적인 삶에 어쩐지 마음이 끌린다.


히라야마는 카세트테이프 구멍에 연필을 꽂아 테이프를 감는다. 엄지와 검지로 잡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돌리다 보면 일정한 리듬을 찾게 된다. 그때부터는 속도가 붙고, 감히 기계가 따라 할 수 없는 가속도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촤라락 촤라락' 연필을 중심으로 테이프가 벵그르르 돌아가는 모양새는 한 편의 또 다른 음악이다.


어쨌든, 영화 속 주인공은 조용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산다. 아니, 자신의 삶을 지켜나간다. 그것은 세상이 변하고, 속도가 중요한 이 시대에도 결코 가려지지 않는 소중한 가치다. 그는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今度は今度, 今は今'이라 말한다. 그렇게 오늘에 충실하다. 그가 듣는 음악은 디지털로 만들어진 음원도, 요즘처럼 흔해빠진 AI가 만든 음악도 아니다. 어쩌면 번거롭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하는 음악들이다. 자신의 원하는 하나의 음악을 듣기 위해, 그 곱절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 기다림은 켜켜이 쌓여 인간다움이 된다.


장인이 혼을 담은 연필 깎기


몸과 마음의 수련은 인간 정신을 고양한다. 무슨 말일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행위라는 거다.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는 책이 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연필을 어떻게 깎을 거냐의 방법을 말하는 책이다. 대체 무슨 정신 나간 책인가? 누가 연필하나 못 깎는단 말인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대체 언제쯤 연필을 깎아보았는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키보드에, 스마트폰 자판에, 시리와 빅스비에 익숙해져 버린 거다. 우리의 대뇌피질 속에서 연필깎이의 방법들은 이미 새까맣게 잊혀진지 오래다. 그렇다! 이게 다 못돼 먹은 AI의 음모가 탓이다. 먼 훗날 자신의 도움 없이는 글도 쓸 수 없고, 대화도 나눌 수 없는 그런 인간성 상실의 인류를 만들려는 AI의 못돼 먹은 계략이 틀림없다. 어떤가? 등골이 서늘하다.


그래서인가? 저자는 장인의 혼을 담아 연필을 깎는다. 제정신이 아닌 듯도 보이지만, 그러기 위해 철저한 준비운동과 스트레칭을 한다. 당연히 손가락을 풀어주고, 고글로 눈을 보호하고, 보호 장구로 신체를 방어한다. 주기적으로 손가락 근육의 벌크업을 위한 음식과 명상에도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어쨌든.



책 속 저자는 연필 깎기 체조를 수련 중이다


물론 연필 돌리기와 연필 깎기만으로 거대한 AI의 파도를 막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 손가락의 힘이 길러지면, 자연스럽게 파워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인류의 최후의 방어 수단으로 AI의 전원을 끄는 것은 어쩌면 이런 연필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 수행의 훈련에서 오는 결과일지 모른다. 그렇다. 인류의 운명이 우리의 손가락에 달렸다.


그렇다. 아날로그만이 AI를 이긴다. 오늘부터 연필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자. 연필을 깎고, 연필 돌리기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에게 손 편지를 쓰고, 하루의 기록을 남겨보자. 이게 다 AI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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