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카포트로 AI 이기는 법

by BOX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인류의 먼 조상들은 '다방'이라 일컬어지던 공간에 모여, 인간 종족의 모든 활동을 자신의 동족들과 함께 공유하며, 인류의 앞날을 설계했다고 한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주로 주문한 음료는 다름 아닌 커피다.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이 황금비율 golden ratio · 黃金比 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되어, 피보나치 수열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진짜다. 자연, 건축, 디자인에 있는 모든 균형미와 마찬가지로, 가장 조화롭고 안정적인 비율이었다. 맞다.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은 중력과 인력, 질량과 시간의 상대성 같은 불변의 우주의 법칙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인류는 그 조화로운 가치를 함부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깟 '다방커피' 레시피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이런 돼먹잖은 소리냐고? 그렇지 않다! 기억하는가? 인류는 이미 '쌍화차'의 레시피를 잃어버린지 오래다. 왜일까? 이게 다 AI의 음모 탓이다. 맞다. 지나치게 기계에 의지하기 시작해서다.


당신은 카페에 앉았다. 아마 하루 종일 테이블에 앉아있더라도 아무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미 카페는 기계의 세상이 돼버린 탓이다. 이제 당신은 '키오스크'라는 어마무시한 기계 앞에 줄을 서야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무심한 스크린 앞에서 주문을 해야만 한다. 이제 더이상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키오스크는 자비도 인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손가락을 잘못 놀리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잘못하면 '도르마무'의 키오스크 무한굴레에 빠져버리고 마는 거다. 아! 이제는 그 흔해빠진 커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할 판이다. 뿐만 아니다. 징~징~ 몇몇 커피숍은 로봇팔이 커피를 만들어준다. 그렇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미 AI의 공격이 시작된 거다.


지금 이 순간, 조금 더 천천히


식당의 점원 페이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를 틀어놓고 캘리포니아로 떠날 꿈을 꾸는 여인이다. 어느 날 페이는 매일 가게에 들러 음식을 사가는 경찰 633에게 옛 애인이 남기고 간 편지를 건네려 한다. 사랑이 끝났음을 직감해서였을까? 633은 커피를 마신 후 나중에 편지를 보겠다고 말한다. 그 사이 무심한 사람들은 빠르게 두 사람 앞을 지나간다. 633은 아주 느리게, 아주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페이는 그런 633을 느리고도 나른한 시선으로 지켜본다. 지금 이 순간, 우주엔 오직 두 사람만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뿐이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重慶森林> 속 633은 아주 천.천.히. 느린 커피를 마신다. 그는 이제 곧 이별을 통보받을 것이다. 그는 그 이별은 유예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그가 붙잡고 싶은 시간의 파편이다.


이 무비씬은 <중경삼림>의 명장면이다. 맞다.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그 영화다. 어쨌든 그 느림은 참 인간적이다. 633은 페이에게 커피를 주문한다. 그리고 페이는 그가 마시는 모습을 지켜본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키오스크는 이제 이런 낭만커피 따위는 잊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무슨 말일까? 관계와 인간성은 그만 잊어버리고 ‘빨리 주문이나 하라’ 부추긴다. 하지만 분.명. 키오스크로 주문을 했다면 영화 속 이 아름다운 순간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맞다. 이게 다 인류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어, 인간 종족의 씨를 말리려는 심사다. 틀림없다. 모두 AI의 못된 음모다.




AI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커피 마시는 법


인류가 쌍화차의 레시피를 잃어버려, 스스로 낭만을 잊었듯, 커피 주문과 레시피를 잃어버리게 만들어, 인류가 낭만적인 사랑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AI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됐다. 한데 늦었다. 이제 더이상 무자비한 키오스크의 습격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커피 레시피는 몽땅 기계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이유로 우리는 조금 더 천천히, 느리게 시간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무슨 말일까? 직접 수동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고, 물은 담고, 모카포트를 올리고, 보글보글 커피가 끓어오르는 시간을 만드는 거다. 어떤 기계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우리 스스로 커피를 만들어보자. 물론 커피를 내리는 시간은 참을 수 없이 지루한 시간이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조금은 천천히, 조금은 느리게. 오직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낭만으로!


수동 그라인더로 커피원두를 갈다 보면 자연스럽게 팔근육이 강화된다. 뜨거운 물과 수증기에도 익숙해진다. 이제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AI 본체에 끼얹어보자. 전원이 꺼지고, 인간은 AI의 검은 술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아날로그만이 AI를 이긴다.


그러니, 오늘부터 커피를 내리자.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무기는 준비됐다. AI 본체에 뜨겁게 끼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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