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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Dec 22. 2023

Jeju에서 보내는 편지

To. dnflEkfemf 에게

各自圖生(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꾀함). 언제부터인가 나의 좌우명이 된 사자성어지. 너희들에게도 이렇게 인사하곤 했지, 그러더니 결국 그리 되었네. 이제 스무 살이 모두 넘었으니, 오히려 나만 잘 살면 되는 그런 시간이 되었구나.


몸이 떨어져 있으니,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느껴. 부딪히며 살 때는 일부러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제는 문득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 친구의 말대로 이미 전생의 인연이었나? 내가 언제 너희들과 그런 다정한 삶을 살았었나 싶은... 그런 느낌말이야.

 

난 너희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물론 정도를 좇는 페미니스트가 되면 좋겠지만 말이야. 쉽지 않은 일이니... 하지만 우리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본인의 의지가 아닌 주어진 삶을 더 이상 살지 않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사회, 문화적 민감성의 지수를 높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 왜 여성들이, 할머니, 엄마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이야. 왜냐하면, 그녀들의 삶의 행적은 곧 너희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

 

나는 이제야 조금 느끼는구나. 그녀들의 삶에 눈을 감고 외면했던 그 시간들이, 결국 나에게 다가와 있다는 것을 말이야. 너희들도 나를 보고 배웠겠지. 그런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이제 그런 핑계는 안 되는 시간이 되었어. 너희들은 어른이야. 나에게 배웠거나, 나로 인해 그렇게 된 부분도 너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른 말이야.

 

많이 불안하고 불편했을 거야. 지들이 좋아서 결혼해 놓고, 많이 싸우고, 많이 다른 정서를 갖고 있고, 많이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다른 부모들처럼 그냥 좀 넘어가거나, 둘 중 하나가 좀 져주거나 했어야 하는데... 둘은 늘 팽팽했지. 이런 점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너무도 다른 사람이 만났으니 말이야. 결혼하기엔 너무 어린(어리석은) 사람들이었지.

 

그래도 살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구. 나에게는 다른 엄마들처럼 지혜롭게(?) 상황을 피하거나, 잊어버리고 살지 못하는 타고난 성향이 있기 때문일 거야. 그래도 그냥 살아 보려 했는데 예순 전후로, 내 안의 분노를 더 이상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었지. 갱년기 조울증이라고 진단을 하는 네 아빠의 뺨을 갈기고 싶었지만, 이건 컨트롤했지. 그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난 이 분노를 좋아하게 되었어. 분노가 없었다면, 난 아마 조울증에서 조현병으로 병명이 바뀌고, 병원으로 보내졌겠지. 거긴 모두 너무 바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늘 찾아내는 곳이니까. 분노 덕분에 내가 살아있구나. 느꼈어. 그런데 혹시 너희들에게 이 지점이 불편했니?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내 분노가? 혹은 너무 과하다 싶은 내 분노가? 그렇더라도 이 부분은  사과하지 않을 거야. 분노는 나를 살렸으니까.


엄마의 분노는 두려움이었어. 남편을 두려워하는 여성의 분노 말이야. 그래서  스스로도 너무 부끄럽고 용서가 안 되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여성들의 분노의 이유를 알아보라는 거야. 수천 년 걸쳐 이어져 온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이 분노를 삭이며 한이 되었던, 그 분노를 직시하라는 거지. 불편하겠지. 하지만 불편, 불안에서 한 발 앞으로 나와 인류의 1/2인 여성들의 삶을 돌아봤으면 좋겠어. 결국 그 삶이 너희들 삶의 도화지가 될 테니 말이야. 좀 평평하고 깨끗한 도화지에 너희들의 삶을 다양하게 그려 내길 바래. 누군가 마구 그려놓은, 이미 너희 취향이 아닌 그림 위에 덧그림을 그리다, 어느새 자신을 잃어버리질 않기를... 너무 늦지 않았기를...


책을 추천할게. 이 책을 읽어보렴. 「전쟁 같은 맛」(그레이스 M. J., 주혜연 역, 2023. 글항아리)  엄마의 조현병을 좇아가는 여정에서 작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을 마주하며, 진정으로 엄마를 추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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