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원래는 호주에 가자마자 세컨 비자를 취득하려고 했다. 이왕 호주에 가서 살기로 한 거, 2년 정도는 살아야 충분하다고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다가 그 비자가 나올 수 있는 산업 중 호주의 곡물 생산 회사로 유명한 그레인콥이 마침 내가 갈 때쯤 사람이 많이 필요한 시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차가 없어도 오일쉐어하는 그룹이 꽤 있다고 하니 나의 경우에도 뽑힐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호주 워홀 3대장이라 불리는 고소득 직종 리스트에 있는 직장이라고 하니 안 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블로그나 유튜브에 올라온 후기들을 보니 포지션만 잘 정하면 관련 경험이 없어도 충분히 일할 수 있고 집이 없어도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집에서 묵거나 페이스북, 플랫메이트를 통해 근처 숙박을 구하면 되는 듯했다. 그래, 이거야. 농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시급은 더 높게 쳐 주면서 일 강도는 비슷하거나 그 이하인 곳. 내가 바라는 거였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미리 이력서 최종본을 만들고 그레인콥에 지원했다. 또한 그곳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지출 없이 숙박을 해결하고 싶어 미리 알아둔 하우스시팅/펫시팅 사이트 멤버십에 가입해 NSW주에서 하우스시터/펫시터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물론 처음 일주일 정도는 지난 8개월 동안 호주에 가겠다는 일념하에 열심히 달려온 나를 위해 호스텔에서 머물며 시드니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일부터 시작해 금방 지치지 말고 아예 초반에 호주를 즐기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는 어떤 워홀 선배의 조언을 받든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 갔다. 호주에 도착하고 나서도 연락이 오는 데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안 그래도 기본적인 업무 처리에서부터 자꾸 문제가 생겨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가장 중요한 일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통 보이질 않으니 불안에 잠식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일이 내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NSW주에 있는 현장 매니저들 번호를 알아내 문자로 이력서를 돌렸다. 하지만 그중 대다수는 답하지 않았고 일부만이 이미 사람 다 뽑았다고, 이번 시즌은 규모가 작아서 사람을 많이 뽑지 않는다고, (이미 알고 지원한) 사이트에서 지원하라는 식의 답변을 보내 왔다. 당황스러웠다. 분명 듣기로는 언제나 사람이 많이 필요한 직종이기 때문에 호주에 와서 지원해도 일하게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 시즌은 규모가 작다니?
집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호주에서 살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집과 반려동물을 맡기는 것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 없는데 당시 나는 그걸 고려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일단 내게 숙박비를 아낄 수 있는 선택지는 그것밖에 없었고, 썩은 동아줄이어도 못 본 체하며 붙잡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뤄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 밖의 현실은 예외로 작용할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한 번도 현실에 부딪혀 본 적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철없고 안일한 소리였다. 사리 분별 못하는 아이에게는 차갑고 각박한 현실 경험만이 해결책이다. 그걸 깨닫게 해 주려는 듯 이번에도 역시 무응답과 거절의 답변만 돌아왔다.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아껴 온 덕분에 당분간은 돈 걱정 없이 살아도 괜찮았다. 그럼에도 이곳에 일하러 왔다는 목표, 게다가 나에게 잘 베풀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일을 구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함부로 사 먹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저렴하게 구한 재료들로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고, 몸에 기운이 없는 증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다. 일주일 동안 여행은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이미 끊어져 넘어갈 수 없는 다리 앞에서 서성이기만 했으므로 이제는 정말로 다른 다리를 찾아보아야 했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 가지 않음을 깨닫게 됐으니까, 그때그때 현실에 맞춰 움직이는 법을 배울 차례였다.
다음으로 넘어가게 된 호스텔은 하루 연장해 총 8일을 묵은 첫 번째 호스텔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실망스러웠다. 첫인상은 그랬다. 심지어 전산상에 문제가 있었는지 내가 예약한 방과 다른 방을 배정해 주어서 그냥 환불 받고 다른 데로 빨리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짐을 이끌고 택시를 타고 온 것도 아니고 버스와 도보를 이용해 온 것이어서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짐을 대강 정리한 뒤 같은 호스텔에서 함께 넘어온 콜롬비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I came here because I wanted to, but I don't know what to do now. Nothing goes the way I want.(내가 오고 싶어서 여기 온 건데, 이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그 무엇도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 가지 않아.)”
“I feel the same way. I also miss my mom.(나도 똑같아. 난 엄마가 보고 싶어.)”
우리는 10인실 혼성 도미토리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서로의 슬픔을 나누어 가졌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되었고, 마침 금요일 밤이라 호스텔 마당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직원들이 나눠 준 소세지 토스트를 먹으며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리셉셔니스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Can I join you?(나도 껴도 돼?)”
브라질에서 온 그는 우리와 주로 영어로 소통했고, 내 친구와는 이따금씩 포르투갈어-스페인어로 소통했다. 각자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언젠가 리셉셔니스트로서 일해 보고 싶었던 것이 생각나 그에게 여기에서의 리셉셔니스트 일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만족도 최상에 가까워 보이는 답변을 했고 그 순간 익숙하지만 언제 느껴도 짜릿한 어떤 감정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그는 해당 호스텔이 구인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고 나는 곧바로 이력서 어디로 보내면 되냐고 물었다. 호스텔 주소로 이메일을 보내면 된다는 말을 기억해 두고 있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이력서와 커버 레터 내용을 다듬고 해당 이메일 주소로 파일들을 보냈다. 새로운 꿈이 나의 날개를 펼쳐 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안은 온데간데없고 설렘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지금으로서는 1년도 이곳에서 버티기 힘들 것 같으니 일단 시티잡을 구하자. 이곳에서의 생활이 정말 즐거워지면 그때 세컨 비자 따는 것을 재고해 보자. 그런 생각도 하면서.
호텔/호스텔 관련 경험도 없고 영어 실력도 그리 출중한 편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는지 인터뷰 이후에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한 번 착각을 크게 했구나.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무너질 거면 차라리 기대를 안 하는 게 나았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어떤 가능성에도 기대지 않고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일과 집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레인콥에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껏 미뤄 두고 있던 집 구하기 문제부터 해결했다. 플랫메이트를 깔고 - 호주에서 집 구하는 어플 - 시드니 근처에 있는 괜찮은 집들에 장문의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나는 어떤 목적으로 호주에 왔고, 호주에 머무는 동안 어떻게 지낼 것이며, 집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은. 나의 구체적인 자기PR이 마음에 들었는지 답변들이 바로 왔고 그리하여 총 5번의 인스펙션을 - 집 구경 - 내일과 모레 일정으로 잡게 되었다.
첫째 날에 마지막으로 들른 포츠포인트의 하우스는 인스펙션하면서 바로 느낌이 왔다. 이곳이다. 내가 앞으로 지낼 곳. 사람들과 일에 부딪히며 웃고 울 나의 첫 번째 집. 그렇게 하루 만에 바로 집을 구하게 됐고 다음으로 해결할 문제는 일이었다. 호스텔을 통해 출력한 이력서와 커버 레터를 쌍으로 묶은 것들을 들고 다니며 구글맵에 저장해 놓은 가게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마음에 드는 가게들에 들어가 직접 이력서를 돌렸다.
“Hi, how are you? I'm just wondering if you guys are hiring at the moment?(안녕, 잘 지내? 나 그냥 너희 지금 사람 구하는지 궁금해서.)”
밝은 웃음, 유창한 영어 발음, 자신감이 보이는 태도. 워홀러로서 일을 구하러 다닐 때 가장 중요한 3요소를 내가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력서를 돌린 날 저녁, 시티에 있는 카페와 곧 이사갈 집 바로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각각 트라이얼과 인터뷰를 요청하는 문자를 보낸 것을 보고 짜릿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고, 바라는 결과는 반드시 돌아온다. 호주에 오기 전까지 내 삶을 관통하던 명제였고,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래도 다시 내 삶에 적용되는 상황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호주에서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시티 중심의 카페는 시티 중심에 있는 카페답게 사람들이 끝없이 몰렸고 영어 이름을 잘 모르던 나는 캐셔로서 빨리 받아 적어서 넘겨야 하는 그 쉬운 일 하나 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한국에서 캐셔로 일한 경력이 도합 2년 가까이 되는데 호주에서는 쓰는 언어가 다르니 익히 알던 일도 모두 처음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당연하게도 트라이얼에서는 떨어졌고 카페 캐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게는 레스토랑 섹션 웨이트리스 인터뷰가 남아 있었고, 따라서 오래 슬퍼하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애초에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한국인처럼 생겼지만 호주 영어를 구사하던 바 매니저와의 인터뷰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바로 트라이얼 일정을 잡게 됐는데, 할 수 있으면 빠르게 일들을 끝내야 하는 성미 탓에 이사하는 날 저녁에 트라이얼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사를 마치고 저녁이 될 때까지 웨이트리스로서 필요한 영어 공부를 했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고, 걸어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총괄 매니저로부터 트라이얼 전에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수집할 수 있었다.
트라이얼은 러너로서 - 서빙하는 사람 - 하게 됐는데 예상보다 더 힘들었다. 이미 가게의 메뉴를 외울 수 있는 만큼 외우고 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웠다. 손님들에게 음식을 낼 때마다 음식의 이름과 그것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모두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한몫했다. 실전 비즈니스 영어는 일상에서 쓰는 영어와 차원이 달랐고 그제야 나는 영어를 그리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음식이었어도 영어로 처음 일하는 상황에선 설명하기 힘들었을 텐데 해당 레스토랑은 일식집이었으니, 더 뇌에 안 남는 게 당연했다. 상당히 고급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에서 내가 과연 일할 수 있을까 싶었으나 매니저들은 나의 밝고 열심히 일하려는 모습을 좋게 보았는지, 다음 주부터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예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여러모로 이상한 날이었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부담감에 짓눌려 끝없는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음식 사진과 함께 이름, 재료들을 외운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원어민들 사이에서 어설픈 영어로 일할 생각을 하니까 벌써 어지러웠다. 오후 5시, 첫 출근을 앞두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머리도 무언가로 꽉 막혀 있는 느낌이었고 그 어떤 말로도 나의 몸 상태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일은 일이었기에 끝까지 마무리해야 했다. 자칫하면 끊어질 것 같은 정신줄을 혼신의 힘을 다해 붙잡았다. 몇 시간이 더 지났을까, 이제 퇴근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최대한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샤워를 해도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지독한 몸살 감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