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이 갓 지난 내 조카는 새빨간 소화기를 보면 달려간다. 엘리베이터 옆에 비치된 소화기를 보면 두 손으로 꼭 안아보기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소방의 어떤 이미지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숙제처럼 소방차와 경찰차를 좋아하는 시기를 거쳐 간다. 내가 초등학생 땐 경찰관과 소방관은 장래 희망란에 늘 적혀있었다. 몇몇은 축구선수, 의사, 대통령을 적곤 했는데, 그것 말고도 또 단골처럼 등장하는 단어가 있었다. 그건 바로 '선생님'이었다.
공부엔 재주가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과목은 지리였다. 난 아직도 여행만 생각하면 여전히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니, 그때는 오죽했을까. 난 쉬는 시간이면 지도를 펴서 나 혼자 비행기를 타고 잠깐 인도며 유럽이며 남미를 다녀왔다. 그때만큼은 상상만으로도 텁텁한 교실 공기가 여행자의 냄새로 가득 차는 듯했다. 쾌쾌한 매연 냄새, 개발도상국의 정돈되지 않은 길거리, 갖가지 손맛이 첨가되어 위생과 거리가 먼 길거리 음료와 음식, 그것마저 내겐 낭만으로 치환되었다. 지도를 좋아하다 보니 지리를 좋아하게 됐다는 말은 우스울 수 있지만, 내겐 거짓이 아니었다. 지리를 좋아하다 보니 유독 다른 과목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수학 5등급, 영어 4등급, 역사 9등급. 롯데자이언츠 순위표를 빼닮은 내 성적표에 유일하게 기록된 '2', 이건 내 지리 성적이었다.
수학이나 영어를 질문할 때면 최대한 멍청한 표정을 하며 상대방을 잔뜩 섭섭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리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친구들이 질문하면 최대한 상세히, 천천히 답변했다. "우각호가 뭐냐고? 봐봐. 감입곡류하천은 산맥 따라 이래 에스 자로 내려온다이가. 그럼 바깥쪽은 유속이 빨라 침식되고 안쪽은 비교적 유속이 느리니 퇴적되겠제? 그렇게 계속되다 보면 굴곡이 심해지고, 그게 심화되면 물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거든? 그럼 그 만난 지점끼리는 거기가 최단 거리가 되니, 그쪽으로만 물이 이동하게 되고 원래 굴곡이 있던 지형은 물길이 끊겨 새로운 지형이 만들어지는데 그게 우각호다." "와 바로 이해했다. 근데 니는 수학을 그래 했으면 인서울 했겠는데?" "뭐라했노, 다시 말해봐라."
설명을 해줄 땐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설명할 때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남들보다 이해가 느렸던 내가 이해할 정도의 설명은 웬만하면 누구에게나 충분한 설명이 됐다. 난 마음속 어딘가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영어 캠프 생활 교사를 모집합니다.' 학교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봤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여름방학 동안 실시하는 캠프프로그램이었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수업을 돕고, 기숙사에 머무는 동안 생활을 보살펴줄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글이었다. 운 좋게 난 생활 교사로 채택됐고, 여름방학 동안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됐다. 그리고 난 최악의 경험이자 최고의 경험을 동시에 했다. 난 아이들이 이렇게나 체력이 좋고, 잘 울고, 잘 웃고, 소심하고, 잘 삐치고, 교활하고, 순수한지 몰랐다.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속성을 가진 아이들이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모든 시간이 나를 시험하던 순간들이었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하루, 24시간 동안 아이들 옆에 붙어있어야 했다. 오전부터 오후 동안은 내가 따로 맡은 반 아이들의 학급 선생님이 되어야 했고 수업을 마친 뒤엔 기숙사 선생님이 되어서 해당 층의 아이들을 보살펴야 했다. 취침 시간이 지나도 잠자리가 낯선 몇몇 아이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방에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면 컴컴한 복도에 앉아 잠이 잘 오는 음악을 틀고 함께 양을 셌다. 그렇게 모든 아이를 재운 뒤 씻고, 내일 있을 일정 회의를 마치고 나면 자정이 훌쩍 넘어있었다. 죽은 듯 침대에 엎어져 살짝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덧 방안엔 햇빛이 가득 차 있었고, 퀭해진 눈으로 주섬주섬 칫솔을 꺼내 물면 입안엔 입병이 돋아있었다. 난 신용카드 긁듯 매일 내일의 체력을, 다음 주의 기력을 당겨 썼다. 아이들의 오전수업을 인솔하던 내 혀엔 늘 구내염의 불쾌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유난히 눈길이 가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는 맨날 울었다. 수업 시간에도 소극적이었고, 밥 먹을 때도 침울했고, 밤이면 매일 베갯잇을 눈물로 적셨다. 괜한 오지랖일 수 있지만 그 아이가 집으로 가지 않길 바랐다. 언젠가 잊힐 기억일 수 있지만 다른 학교 친구들과 함께 지내보고, 집만큼 편하지 않은 낯선 침대에서 자보고,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고 때론 남을 배려해야 하는 환경에서 지내보길 바랐다. 부모님께 전화하면 당장 오늘이라도 아이는 집에 갈 수 있었지만, 난 그 아이가 잘 적응하길 바랐다. 아이에겐 불편하고 힘든 시간이었을 거다. 그날도 아이는 엉엉 울었다. "선생님 흑흑, 저 집에 갈래요 흑흑, 집에 보내주세요, 네?" 난 오랜 시간 동안 아이를 타이르고 돌아서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날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아, 내가 너무 했구나. 오늘 집에 돌려보내자.'라고 마음을 먹었던 그날 저녁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고등어 한 마리 안 드실래요? 오천 원 오천 원!" 그 아이였다.
눈을 의심했다. 잠옷을 허리까지 추켜올려 몸빼바지처럼 입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며 자갈치시장 상인을 흉내 내고 있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내가 조직한 우리 반 '하린이 특공대'였다. 하린이의 적응을 돕기 위해 시간 날 때 친구 방으로 가서 놀아주라고 부탁하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던 고마운 아이들이었다. 매일 내 부탁으로 하린이 방에 찾아가 몇 시간씩 같이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친구들에게 마음을 연 하린이는 그날부터 완벽히 적응했다. 하린이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환한 얼굴로 오스카에 버금가는 연기로 방안을 휘어잡는 중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여기가 복작거리는 자갈치 시장 바닥이었다. 필통을 꺼내 지퍼를 열곤 볼펜과 연필을 바닥에 거칠게 내려놓고 야무지게 소금을 착착 뿌리는 시늉을 하며 내게 얘기했다. "싸게 줄게 총각~" 난 흡족한 표정으로 세 마리를 주문했고 유례없던 호황에 하린이는 허겁지겁 친구의 필통마저 가져와 열어젖힌 뒤 염장하는 시늉을 했다.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찡했다. 며칠간 무겁게 쌓여있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난 아직도 그때, 그 여름을 잊을 수 없다. 잠깐이었지만 어릴 때 막연히 동경하고 꿈꿨던 선생님으로 불릴 수 있었던 그때가 여전히 뜻깊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