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유성'을 쓸 줄 아는 사람?" 디즈니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등장하는 라일리의 감정 중 하나인 소심이의 대사다. 그녀의 첫 등교 날, 낯선 환경에 불안감이 고조된 나머지 혹시나 마른하늘에 유성이라도 떨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한 것이다. 늘 경계하고 의심하는 소심이의 모습은 나와 닮았다.
사실 소심함은 처음부터 나와 가까운 감정은 아니었다. 이 성향은 대학을 졸업한 뒤 조금씩 생겼고 일을 시작하며 더 짙어졌다. 돌다리도 굳이 두들겨 봐야 하는, 안전 주의자가 되어야만 하는 직업 특성도 있겠지만 사람들을 만나며 지금의 성향을 보이게 된 영향이 컸다. 힘든 일이 해일처럼 밀려오던 때가 있었다. 문을 걸어 잠가도 마음 틈 사이로 구정물이 밀고 들어왔고, 그럴 때면 가슴속엔 물이 가득 찬 듯 숨쉬기가 버거웠다. 무엇을 해도 안 될 것만 같고 세상과 사람을 멀리하던 그때, 난 깨달았다. 일상에서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아버지가 사고가 났던 그날, 모든 것이 날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홀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고 누나와 내가 매일 교대로 병원의 밤과 낮을 지켜야 했다. 그때 내겐 괜찮냐고 묻는 지인들의 안부조차 버거웠다. 안 괜찮았으니까. 그 말을 괜찮은 척 삼킨 뒤 아무 일 없는 듯 얘기해야 했으니까. 그 꼴에도 자존심은 지켜야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말들도 그땐 깊은 상처가 됐다. 문장이 무겁고, 거칠고, 날카롭다는 것. 그건 우리가 물리적으로 관찰하고 측정할 순 없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말의 속성이다. 게다가 그땐 내가 연약하고 힘이 없었으니 그런 말들이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난 입에 자물쇠를 잠갔고, 말해야 할 땐 신중하고 천천히 말을 입술로 옮겼다.
으레 묻는 안부조차 버거웠던 그때를 보내고 나니 사람들을 만나면 좀 더 신경이 쓰였다. 조약돌을 고르듯 예쁘고 표면이 매끄러운 단어를 골라 상대방에게 건넸다. 말이 내 입술을 스친 뒤엔 영영 되돌아오지 않으니 신중해야 했다. 가끔 자기 전 내가 말실수 한 건 없나 하루를, 일주일 전을, 한 달 전을 돌아보기도 했다. 언젠가 지인에게 나의 이런 속내를 밝히니 조금 놀라는 듯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조그만 걱정이 스쳤다. 과한 배려라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누구에겐 다소 피곤할지 몰라도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다. 누구에게도 쉽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분명, 말엔 무게가 있다. 질감도, 온도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를 만나 얘기를 주고받는 게 쉽지 않다. 내겐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사람들과 약속이 많은 달엔 징검다리처럼 나만의 의무 휴일을 만든다. 휴일엔 조용히 소파에 누워 상의를 걷고 허리춤 어딘가에 있는 단자에 충전기를 꽂는다. 빨갛게 표시된 잔량이 내 이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번쩍거린다.
소심이는 앞으로 나와 함께 할 캐릭터다. 움츠러든 어깨, 음울하게 주변을 감싸는 보랏빛, 늘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바쁘게 살피는 모습은 누가 봐도 닮고 싶은 면모는 아니다. 하지만 내겐 그런 소심이의 모습이 마냥 못나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감, 다른 이의 마음을 살피겠다는 의지가 쭈뼛쭈뼛한 손짓발짓 사이로 비친다. 배터리가 자주 소진되더라도, 그래서 매번 소파를 찾게 되더라도 소심함을 가까이하려 한다. 난 당돌한 한마디보다 얌전한 문장을 가까이하고, 기꺼이 쭈뼛거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