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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은새 Jun 09. 2024

편리한 세상

240609

요즘 난 내가 더 불편해지길 바란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편리해진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전에 꼬박 한나절이 걸리던 이 구간은 이젠 분침이 한 바퀴 돌기도 전에 도착한다. 커피추출기 버튼을 한 번만 누르면 집에서도 카페와 견 줄 만큼 꽤 괜찮은 커피를 마실 수 있고, 휴대전화 화면을 엄지로 꾹 눌러 결제 한 번만 하면 달걀 한 판이 집 앞에 도착한다. 이뿐인가. 십여 년 전만 해도 내 손에 들어오는 TV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우직하고 투박한 브라운관, 찌지직거리며 어디가 고장 난 듯할 때 머리를 퍽 때리면 다시 정신을 차리던 그 TV가 이젠 손바닥 안에 들어온다. 기술의 발전은 이렇게 경이롭고 놀랍다. 동시에 편리하다. 그런데, 지나치게 편리하다.
 
편리함이라는 단어 아래로 많은 것들이 빛을 잃고 사라졌다. 불편 앞에는 ‘감히’가 오고 편리 앞에는 ‘역시’가 붙는다. 편리함이 미덕인 세상이다. 인간은 역 체감을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심이 투박한 볼펜을 쓰다가 부드럽고 섬세한 볼펜을 썼을 때 느끼는 만족감보다 좀 더 비싸고 질 좋은 볼펜을 쓰다가 뭉툭하고 거친 볼펜을 사용했을 때 체감하는 불만이 더 크다는 것이다. 누구도 기꺼이 편리함을 역행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편리함 뒤엔 숨겨진 가치가 존재한다. 내게 편리함의 반대말은 불편이 아닌 따뜻함이다. 내가 첫 여행을 떠나던 그땐 디지털 지도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종이 지도와 가이드북을 번갈아 펼치곤 물어물어 숙소를 찾아갔고, 숙소에 도착한 그날 내 지도엔 생소한 우에노 동물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를 봐도 길을 알 수 없어 헤매던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동물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쭈뼛거리며 들어온 내게 직원들은 손짓발짓으로 숙소 가는 길을 친절히 알려 주었고, 그 순간은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가끔 따뜻함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난 사전 대신 이 순간을 펼치곤 한다. 과연 지금 똑같은 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이 선물 같던 순간을 마주칠 수 있을까. 한 뼘 기술이 나아갈수록 한 보폭 추억으로부터 멀어지는 건 아닐까. 우린 다가올 미래에 생길 어떤 추억을 잃으며 현재의 편리함을 쫓고 있는 건 아까.
 
불편이 반가운 건 비단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땐 노트북이나 태블릿 대신 일기장을 펼쳤다. 손 글씨는 감정을 담는다. 슬플 때는 흐릿하게, 화날 때는 매섭게, 나른할 땐 휘갈겨 쓴다. 그에 반해 깜빡거리는 커서 앞에 놓인 글자는 늘 같은 온도로 올곧고 똑바르게 서 있다. 그 글자엔 손 글씨에 존재하는 읽는 ‘맛’이 없다. 가로, 세로 최적의 모양새로 또박또박 쓰인 글자는 굴림이니, 궁서니, 고딕이니 하는 글자로 불릴 뿐이다. 또한 일기장은 종이와 글, 세월을 함께 품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이테처럼, 와인처럼 세월을 담는다. 마우스 커서가 드르륵 돌아가는 소리는 검지가 종이를 넘길 때 귀를 스치는 소리를 이기지 못한다. 음표에 이기고 지는 것이 어딨겠냐만.
 
난 좀 더 내가 불편해지길 바란다. 기꺼이 편리함에서 좀 더 멀어지고 싶다. 내가 살던 옛집에선 이웃과 자주 인사를 주고받았다. 누나와 내가 싸워 한겨울에 쫓겨나 현관 앞에서 잘못을 빌고 있으면, 옆집 아주머니께선 또 싸웠냐 묻곤 얘기를 들어주고 집에 들어가셨다. 옛것엔 추억과 따스함과 이야기가 있다. 합리적이고 신속한 현대의 기술이라도 결코 이곳까진 닿지 못한다. 난 여전히 편리함과 불편함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 그러나 내가 언젠가 한 곳에 멈춘다면, 그곳은 은은한 온기가 공간을 채우는 아날로그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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