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두 사람이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한 뒤, 한 친구가 자신의 숟가락, 젓가락을 미리 꺼내 식탁에 올려두자 다른 한 친구가 그것을 보곤 짜증을 내며 ‘넌 진짜 배려심도 없지, 왜 네 것만 그렇게 세팅해? 넌 부모님이랑 와도 그렇게 해?’라고 물었다.
저분을 미리 꺼내 놓은 친구가 당황함과 궁금함으로 물었다.
“왜 내가 너 것을 꺼내 줘야 해? 우리 부모님들도 각자 알아서 꺼내셔”
저분을 혼자 꺼낸 친구의 부모님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자식을 키웠던 터라 이 친구는 자신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반대로 타인의 저분을 함께 준비해주지 않는 것이 이기적이고 배려심이 없다 배워온 다른 친구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처럼 타인에게 분노가 생기는 것은 타인의 행동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을 빗대어 비교를 할 때 일어난다.
그 말은 내가 타인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우리는 자주 이런 상황을 겪는다.
내가 살아오면서 수동적으로 얻게 된 어느 관념들이 내 안에 깊게 뿌리 박혀 그것들을 토대로 타인을 바라본다.
나의 상식밖에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적게는 의구심을 크게는 분노를 느낀다.
참 이기적이며 자만한 감정이다.
마치 나의 관념이 곧 모든 것의 정의라고 믿는 것과 다름없다.
타인을 향해 분노가 일으려 할 때는 이 사람과 나는 다른 삶을 살아왔고 배워온 것이 다르기에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분노라는 어두운 감정에게 권한을 줄 필요도, 상대에게 내 판단의 잣대를 들이밀며 불편하게 할 필요도 없다.
화를 내는 시점부터 그것은 이미 그들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가 되는 것임을 알고 그저 있는 그대로 타인을 바라봐주면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람다스 선생님의 명언이 있다.(람다스 선생님도 그의 명언도 둘 다 좋다는 말…)
‘숲 속에 가서 구부러진 나무, 올곧은 나무, 푸르른 나무 등의 다양한 나무들을 볼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무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이 나무는 충분한 빛을 받지 못해서 이쪽으로 더 기울었구나’라며 이렇게 자라게 된 이유를 떠올리지 감정적으로 나무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과의 일로 다가오면 이것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당신은 좀 이렇고, 저래’라며 판단하려 든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나무라고 생각하려한다. 이 말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나도 이 많은 날들을 이런 오만에 빠져 내 말이 옳고 너는 틀리다며 타인을 판단하고 내 감정에 분노라는 에너지를 가득 싣고 살아왔다.
요즈음은 늦게나마 나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들을 하고 있다.
조금 더 열려있으며 따뜻한 에너지로 가득 채운 내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나는 나를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