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었다. 항상 주말에도 바빴던 엄마는 오늘 쉰다며 밖에 나가자고 했다. 침대에서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있던 나는 그래도 오랜만이니까 라는 생각에 일어나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어릴 땐 한 달에 한두 번은 엄마와 함께 바깥 구경도 했었는데, 내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엄마도 나도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어른이 되면 엄마와 좋은 곳을 놀러 가야겠다는 건 내 망상이었을까. 서로가 시간을 내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내 의지가 부족했을 것이다. 친구와의 약속을 미루고 엄마의 손을 잡는 게 그리도 어려운 게 아니었을 텐데.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엄마와 향한 곳은 동인천이었다. 동인천은 과거 인천의 도심이었다. 젊은이들은 모두 동인천으로 모였고 인천의 홍대쯤이라고 보면 될지도. 그러나 내가 지금 서 있는 동인천은 그저 사람들이 빠져나간 구도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들은 1990년대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으며 간판만 바꾸어 요즘 세대인 척하고 있다. 아저씨들이 아무리 요즘 유행하는 옷을 걸치고 머리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들이 아저씨인 걸 아는 것처럼 동인천은 그런 아저씨 같은 동네다. 진한 스킨로션 냄새가 나서 누군가에겐 거부감이 들지만, 나에겐 친근한 동네 아저씨처럼 다가온다.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주민인 나도 사람들을 만날 때면 동인천을 벗어난다. 가끔은 용기를 내어 동인천에서 보자고 하면 돌아오는 답은 대부분 “거기 가서 뭐해?” 였다. 나는 솔직히 딱히 뭐 내세울 것 없는 동네에서 뭘 할지도 몰랐기에 “그럼 다른 데서 만나던가.”라는 답으로 약속장소를 정했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라면 동인천에서도 할 일이 생겼고 재미도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엄마는 동인천에 살고 있었고 학창시절도 이곳에서 모두 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동인천에 대해서는 그녀가 모조리 꿰뚫고 있었다. 괜히 토박이라는 말이 나온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평생을 여기서 보냈다지만 그녀도 자신의 삶을 동인천에서 모두 보냈기에 비교 불가였다.
동인천 인현동 골목에서 철판구이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구석진 곳에 있어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가게였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휑한 가게에서 엄마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사장님이 이야기를 모두 엿듣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후 철판구이 요리가 나왔고, 요리는 기대 이상이었다. 맛집 판별법의 원칙 중 하나인 손님 수가 많을수록 맛있다고 했지만, 이 가게는 판별법의 신뢰도를 떨어지게 했다. 가게를 나오면서 나중에 친구들과 함께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휑한 동인천 인현동 골목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너무 없었다. 그래도 주말인데. 사람이 없는 이유가 단지 11월의 쌀쌀한 날씨 탓만은 아닐 것이다. 문뜩 궁금해졌다. 한때 그렇게 붐볐던 이 골목에 찬 바람만 불게 만든 이유가 무엇일지. 나는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몇 걸음을 함께 걸어가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옛날에 여기서 불이 났어. 그런데 사장이 도망가는 손님들이 돈을 안 내고 가니까 문을 잠가서 많이 죽었어.”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난 흥미가 생겼다. 불이 난 것보다 불이 났는데도 돈을 받지 못했다고 문을 잠가 버린 사장은 내 호기심의 문을 열어버렸다.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언론은 그때 화재 사건을 이렇게 불렀다. 이 화재로 인천 최대의 유흥가였던 동인천역 인근의 구도심 상권은 그대로 무너져내렸다고 했다. 놀라웠던 건 대부분 사망자는 10대 학생들이었다. 축제 뒤풀이로 학생들은 이 호프집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참변의 희생자로 삶을 마감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사람들은 죽은 학생들과 학생들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속된 말로 발랑 까진 애들이 술집에서 놀다가 죽은 거니까 죽어도 싼 거라고. 학생이면 학생답게 행동해야 한다며. 학교는 피해 학생들을 추모하는 게 아닌 퇴학으로 제명하려 했다.
하지만 사건의 내면을 바라본다면 오롯이 술집에 드나들던 학생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릴 수 있을까? 사건 당시 호프집은 너무나도 비좁았다. 50여평 규모의 호프집엔 1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창문은 통유리로 바꿔 달았으며, 합판을 덧붙여 탈출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호프집 건물엔 비상계단이 없었으며 확산 소화기도 공사에 방해된다며 허가 없이 제거했다. 제일 큰 문제는 호프집 주인은 업소 폐쇄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 손님을 계속 받았으며 경찰에게 뒷돈을 주면서 이러한 불법 행위를 계속 자행했다는 일이었다. 참사는 학생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어른들의 비양심적 행위는 균열을 만들어냈고 균열은 곧 붕괴를 의미했으니.
화재 참사에 대해 알아가다 보니 어떤 날짜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희생되었던 4월 16일. 호프집에 번졌던 불길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로 모습을 바꿨을 뿐 다를 게 없었다. 어른들의 욕심으로 희생된 어린 영혼들이 불쌍했다. 꽃을 피울 나이에 그들은 장미나 튤립이 될 수 없었다. 단 한 송이의 국화로 져버렸으니.
참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들보다 내가 마음 쓰이는 이들은 바로 남겨진 자들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의 아픔을 지닌 채 오늘도 살아갈 사람들 말이다. 사랑하는 자식, 좋아하는 친구를 잃은 자라는 타이틀만큼 무겁고 슬픈 일을 없을 테지만, 사람들의 비난까지 견뎌야 하는 이들의 슬픔을 난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제철소 용광로에서 갓 만들어진 무겁고 뜨거운 철 덩어리가 그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혀에서 나온 날카로운 바늘들은 심장에 박혀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기억을 쉽게 잊어버린다. 기쁨도 슬픔도 한순간의 기억으로 잠시 남아있다가 우리 머릿속을 떠나버린다. 나조차도 그렇다. 당장 어제 일도 기억이 안 날 때도 있다. 이런 특성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니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망각으로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모든 걸 지워버리면 우린 다시 원래 그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린 망각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서 곱씹어보며 슬픔과 상실을 배로 느낄 것이다. 진도 앞 차가운 바닷가에서 목숨을 잃었던 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불길에 휩싸여 죽어버린 학생들이 생각났고 그들을 생각하자니 무너지는 성수대교에서 버스에 남겨진 이들이 떠올랐다. 잊어버리는 일은 쉽다. 그러나 나까지 그들을 잊어버리면 누가 그들을 기억해줄까? 잊었기에 반복되는 일들은 아니었을까.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22주기를 맞아 인천시는 ‘인현동 화재’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만이 기억하고 간직하는 사건이 아니라 모두가 이 사건을 공유하고 기억하게 될 수 있는 건 기쁜 일이었다. 아픈 기억을 함께 기억해주는 것. 그거 하나만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골목길을 나부터 기억해야겠다. 즐겁고 유쾌한 기억은 아니겠지만 그 길을 지날 때는 그들을 기억하고 싶어졌다. 힘든 상실의 시간을 지나는 이들에게 들리진 않겠지만 말해주고 싶다. 난 당신들이 지겹지 않다. 오히려 당신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며 들리진 않겠지만 응원하고 있다고. 너무 힘들 때 기대도 좋다고. 당신들 중 누군가는 내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본다면 힘을 냈으면 좋겠다.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니까. 흐르지 않는 상실의 시간 속에서 나도 함께 걷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