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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Feb 14. 2024

다시 백수로 돌아갑니다

돈 대신, 마음의 여유가 생길 거예요

12월 초, 부서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예전에 일하던 회사에 재취업했고, 우리 부서는 100% 재택근무 중이기에  온라인 혹은 전화 상으로 업무 협의를 한다)


"매니저님, 내년에도 계속 함께 일해주실 수 있어요? 혹시 근무 조건이나 연봉 등 적극적으로 반영해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내심 연봉을 조금이나마 인상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절대적인 연봉이 너무 많다 적다의 관점은 아니었고, 같은 팀 동료의 근무 조건이나 태도가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계약직이라는 핸디캡을 달고 더 적은 보수에 더 많이 일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형평성을 갖춰 업무량을 부여하고 월급을 책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이 나쁘면 남들보다 일을 더할 수도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런저런 일을 안 하기로 한 팀원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경우 선택지는 둘 중 하나가 된다. 그가 안 하기로 한 잡일이나 뒤치다꺼리, 또는 부가적인 책임을 맡겠다는 점을 어필하여 내 몸값을 올리거나, 나도 해줄 수 없다며 버티거나. 나는 첫 번째 옵션을 선택했고, 부서장도 납득이 간다며 수긍해 주었다.


그러다 연말이 되어 부서장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공교롭게도 내년 큰 프로젝트 하나가 결렬되어서 같이 일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다만 너무 갑작스러우실 수 있으니 일단 2월까지로 계약을 연장하면 어떨까요?"


회사 측 입장도 이해가 가고, 천천히 퇴사 준비를 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정작 당황해야 할 사람은 나였지만, 내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했다. 부서장은 내년에 함께 할 수 없어서 거듭 아쉽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는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


안 그래도 슬슬 돈벌이가 고통으로 다가오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연봉 인상을 운운하던 때가 불과 3주전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월급쟁이 생활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대부분의 직장 생활이 그렇지만 일복이 있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다. 일복 터지는 유형 중 하나는 굳이 얼굴 붉혀가며 불만스러운 이야기를 하거나 흉흉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자기 세뇌와 함께 참고 견디는 부류다.


나 역시 폐를 끼치기 싫어서 일단 버텨보다가 더 악화되면 건의해 보자며 미뤄두는 편인데 그렇게 지내다 보면 놀라운 자정 작용으로 조금은 느슨해지는 시기가 오곤 한다. 어느 덧 힘들었던 기억은 새하얗게 지워진다. 또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일하게 되고 일복은 기가 막히게도 성실한 자를 찾아낸다.


지난 10개월 동안 이런 패턴을 반복하며,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갈아 넣고 있었다. 끼니를 거르거나 밀가루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불규칙한 수면을 일삼으며 일이 나를 넘어서도록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몹쓸 성실병이 스스로를 망치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 사이 물리적, 정신적인 노력에 비례해 책임감이 더해졌고, 성취욕이 더해졌고, 인정 욕구도 더해졌다.


결론은 뻔했다. 소화불량은 심해지고 수면 장애가 생겼으며 몸살과 장염이 반복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더하기의 삶에서 빼기의 삶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 왔음을 직감했다. 물질적으로 조금 부족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신경 쓸 것들을 줄이고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이고, 내가 나를 인정해 주는 삶이었다. 빼기의 삶이 심신을 얼마나 단단하게 만드는지는 이미 한 번의 백수 생활을 통해 경험한 터였기에, 두려움보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그날 갑작스러운 통보에도 내가 차분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나저나 남는 게 시간인데 뭘 하지? 설레는 마음이 눈치도 없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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