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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Jul 01. 2022

나는 처음으로 엄마가 존경스러웠다.

  띠띠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에버랜드로 놀러 간 애아빠와 아이들이 비가 와서 일찍 왔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물김치랑, 고기 주려고"

  "너는 에버랜드 안 갔니?"


소변을 급히 보고 아래에서 아빠가 기다린다며 서둘러 돌아가는 엄마의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힌다. 아래에서 아빠가 기다린다는 엄마의 말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굴러온다. 생각한다. 휴. 나도 모르게 터진 한숨 뒤로 뜻밖의 생각이 따라붙는다. 우리 엄마 정말 대단하다, 존경심이 인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가 존경스러웠다. 




 젊은 엄마와 아빠는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 

검고 숱 많은 짧은 머리에 큰 알을 자랑하는 선글라스를 낀 엄마는 세련된 경상도 아가씨였다. 나팔바지를 입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카메라 앞에서 찡그리고 서 있는 아빠는 제법 훈남이었다. 


잠깐 만났던 아빠가 한 동안 보이지 않다가 돌연 엄마 앞에 나타났다고 엄마는 기장 앞바다에서 회한에 찬 얼굴로 말했다. 가난하고 젊었던 둘은 적은 돈으로 밥을 먹고 극장엘 가며 데이트를 했을 테다. 


  "확 차 버리지, 왜 다시 만났어?"

  "몰라, 외로웠나 봐"


  외로움에 못 이겨 아빠를 만난 엄만 아마도 그 두 번째 만남에서 나를 가졌을 것이다.(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내가 엄마 딸로 엄마 뱃속에서 둥지를 튼 그 역사적인 순간이 그 재회의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세상에 태어났고, 아빠가 지어준 이름을 가졌다. 엄만 부풀어 오른 배를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에 감추고 결혼식을 올렸다. 갓 태어난 아기는 곧 장 할머니 손에 맡겨졌을 거라고 추측한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씩 돈을 벌고 돌아온 엄마는 제 아이가 저를 알아보지 못하자 서러운 생각마저 들어 작은 아이가 미웠을까. 엄만 종종 지난 일을 스치듯 동생에게 이야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은 들은 이야기를 엄마처럼 스치듯 내게 전했다. 언니! 언니가 엄마를 몰라 봤데. 언니! 엄마가 돈이 없어서 동네에서 국수를 얻어먹었데!


 엄만 시간의 흐름과 사건의 순서와 육하원칙에 걸맞게 지난 일을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저 드문드문 툭 던지듯 이야기했는데, 나는 던진 말을 주워 담아 살을 붙여 가며 엄마의 기구한 과거사를 만들어 갔을 뿐이었다. 괴로운 사건이 찾아오면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로 처연하게 저 어린것을 놔두고- 저 어린것을 놔두고- 반복된 문장을 읊조리며 아빠를 원망했다. 저 어린것을 두고 넌 어디서 뭘 했냐고 펄펄 끓어오르는 악을 뿜어대면 아빠는 인상을 한껏 구긴 채 말이 없었다. 그러면 나는 아, 아빠는 어린 나를 두고 집을 오랜 시간 비웠고 엄마는 아등바등 사느라 몸 고생, 마음고생을 했겠구나. 이런 식이었다. '삶'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엄마와 같은 분노가 빈 마음을 채웠고, 아빠에 대한 미움이 앞섰다. 


   뼛속까지 스몄을 삶의 상흔을 잊은 채 어떻게 아빠와 다시 마주 보고 살 수 있는 것인지. 오랜 시간 생각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을 향한 적개심이었다. 싫고 좋음의 경계가 생기고 내 삶의 신념과 가치관들을 확립해 가면서부터는 엄마가 아빠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피를 토하는 '고통'을 매번 복기하듯 밟아 갔던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움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으니까. '사랑'이라는 이름의 대혼란이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다. 서로에게 보내는 오롯한 증오보다 다음 날, 작은 상 앞에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은 내 우주가 홀로 떨어져 나온 듯한 지독한 외로움을 선사했다. 사사로운 다툼을 넘어 '함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불행은 '사랑'이 어떤 모양이고 어떤 냄새가 나고 어떤 기분인지 형체가 없도록 하는데 일조를 했다.  


  엄마는 밟아도 밟아도 일어나는 잡초 같았다. 어디에서나 자라고 뿌리가 뽑혀도 언제 뿌리가 또 내린 것인지 모르겠는 잡초와 같은 생명력이 엄마에겐 있었다. 장미 같은 화려함 따위보다 잡초와 같은 강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삶을 지독하게 일구고 또 일구고 또 일구었다. 처음만 난 남자를 사랑했고, 그가 가진 결핍을 이해했고, 자신이 그에게 그런 여자임을 받아들이면서 엄만, 그 쓰디쓴 사실을 아프게 넘겼다. 나는 그 사실을 안다. "네 아빤 엄마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사람임을 알았던 거 같아" 숙연한 목소리로 엄만 얘기했었다. 그럼에도 묻는 말에 그럼 이제 와서 헤어져? 엄마는 되려 화를 냈지만, 이제 와서가 아닌 때에도 헤어질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는 걸 나는 이제 알겠다. 비단 동생과 나 때문만이 아니라는 생각은 그날, 아빠가 기다린다고 쏜살같이 내려가는 엄마의 모습 속에서 피어났다. 사랑하네, 사랑해. 급하게 존경하게 된 우리 엄마를 떠올리며 도무지 알 수 없는 둘의 관계에 물음표가 내내 따라붙었다. 답을 찾은 건, 부산에서였다. 

모래 놀이 1급 연수 과정에서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부는 신비로운 관계다"

마음에 확, 들어온 말을 꾹꾹 눌러쓰며 이 보다 더 완벽한 표현을 찾지 못할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신비로운 관계. 결국엔 어떤 단어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신비로움. 애초에 답을 찾을 필요가 없는. 나는 엄마 아빠와의 관계가 너무도 신비롭다. 신비롭다고 생각하니 경이롭기까지 했다. 


  자신의 불행을 짓이기며 삶을 꾸역꾸역 삼켜내느라 어린 딸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이제야 하는 엄마를 보는 게 싫지 않다. 사랑하는 큰 딸. 사랑하는 큰 딸. 미움과 원망을 넘고, 상처와 결핍에 묶기지 않고 엄마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애증을 주고받는 늙은 부부가 여전히 한 집에 살고 있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니 닭살이 돋는다.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화를 봤다. 

저마다의 고통을 아우르고 결핍을 인정하고 부서진 채 살아가는 삶 속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숨어 있는 '행복'을 찾았고, 결국 가졌다. 한바탕 웃음으로 단합회를 여는 모습 속에서 '불행'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어서 눈물이 났고, '우리는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작가의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러니까, 엄마 존경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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