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알코올 중독은 아빠를 세상과 점점 멀어지게 했다. 아빠는 연필과 종이로 도면을 그리던 시절에 건축일을 시작했는데, 아빠는 모든 것이 3D로 변해가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했다.
집의 경제적인 부분은 항상 엄마가 관리해야 했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으로 대인 기피증까지 얻게 되었다. 그 후 아빠는 사람이 많은 곳은 가지 못한다. 그중 한 곳이 은행이다. 그렇다고 아빠가 폰뱅킹이나 인터넷뱅킹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겨우 4자리 숫자인 카드 비밀번호도 기억하기 어려운 아빠에게 인터넷은 너무나 어려운 난제였다.
점점 심해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아빠는 결국 집 현관문 번호키까지 까먹기를 일수였다.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 집 번호키는 몇 년째 아빠의 생년월일이다.
아빠는 핸드폰을 전화를 걸고 받는 목적 이외에는 쓸 줄을 모른다. 나는 아빠에게서 문자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빠가 술에 취해 있지 않을 때 몇 번 가르쳐 보았지만 아빠가 다시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이 리셋이었다. 그래서 아빠는 매해 새로운 스마트폰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아주 오랫동안 2G 폰을 고수했다. 결국 2G 폰이 스마트폰보다 귀해진 시대가 오자 엄마는 아빠에게 스마트폰을 사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세상은 점점 좋아지는데 이렇게 아빠는 점점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빠는 그 자리에 그대로인데 아빠의 주변은 이미 아빠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변해버렸다. 세상이 얼마나 편해졌는지 아빠는 알기나 할까. 애초에 모르기에 불편함도 못 느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별 볼일 없는 사진이었지만 사진 속 하늘은 정말 화창해 보였다. 해는 구름 뒤에 가렸지만 그 자체만으로 존재감을 뽐냈다. 엄마에게 약간은 과장은 섞인 말로 답장을 보냈다.
"우와 어디야? 이쁘다, 놀러 갔어?"
"아빠가 너무 이쁘다고 딸한테 보내준다고 찍어달라고 했대"
"아빠가? 누구한테 찍어달라고 한 거야?"
"편의점 총각한테 부탁했나 봐"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제가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멀리 사는 딸한테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요. 저 대신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나요?'
사진을 찍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누구에게는 겨우 10 초남 짓 걸리는 일이겠지만 아빠에게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어렵게 부탁을 하여 사진을 찍었겠지. 문자를 보낼 줄 모르는 아빠는 엄마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겠지. 이 것이 아빠한테 얼마나 어려운 도전이었을지 생각하니 왈칵 눈물부터 났다.
비록 방법은 모르지만 마음까지 없는 것은 않은 것일까. 아빠의 알코올 중독은 아빠에게서 많은 것을 누릴 기회를 앗아갔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는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일까.
아빠는 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틈만 나면 나에게 전화했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솔직히 술에 취한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면 하루가 잡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내 번호를 아빠 핸드폰에서 지워달라고 히스테리를 부리기도 했다. 그래도 아빠는 술만 먹으면 멈추지 않고 전화를 걸어왔다. 아빠는 아마도 내 번호를 거실 벽에 적어놓았을 것이다. 담배 연기에 누래진 그 거실 벽지 말이다. 한 번은 전화를 받아 아빠한테 쏘아붙였다. 바쁜데 왜 자꾸 전화를 하냐고.
아빠는 '전화 안 받아도 돼, 나는 그냥 네 목소리라도 들을라고'라고 했다. 나는 말이 없는 아빠의 음성 메시지를 몇 개씩이나 받고서야 알았다. 아빠는 내가 보이스 메일 인사말에 남겨놓은 메시지를 들으려고 내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계속 다이얼을 돌렸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수리입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전화번호와 이름을 남겨주시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빠는 음성사서함을 남길 줄도 모르고 아마 내가 영어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음성 메시지에 녹음된 것은 아빠의 숨소리뿐이었다. 아빠의 숨소리에는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빠의 숨소리뿐인 음성 메시지, 별 볼일 없는 이 사진을 쉽사리 지우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