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올 때 하경이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한 말이다. 하경의 엄마는 아빠 친구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빠가 죽은 지 막 1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스산한 가을의 어느 날, 하경의 엄마는 어둠 속에서 아빠의 친구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엄마는 여전히 여자였다.
건설사의 하청 업체 팀장이었던 아빠는 발판 붕괴 사고로 죽었다. 하청 업체와 건설사는 아빠의 죽음을 흥정했고, 죽음은 아빠의 실수로 결론 났다. 건설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하청 업체는 약간의 위자료로 사고를 마무리했다.
문을 열면 세평도 안 되는 작은 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접이식 책상 겸 밥상 하나, 마트에서 산 행거 하나, 옷 몇 벌, 이불 한 채, 여행용 가방, 책 몇 권. 하경이 가진 전부다.
출근 준비를 위해 거울을 보던 하경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자신의 모습이 엄마를 닮아있다. 십 대 초반까지는 아빠를 닮았던 얼굴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엄마를 닮아가고 있다. 한땐 그것이 좋았다. 선이 굵은 아빠의 얼굴과는 달리, 고운 선을 가진 엄마의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빠의 죽음 이전의 생각이다.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치며 하경이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한다.
톨게이트. 10%의 자신감과 90%의 긴장감이 몰려온다. 한숨을 쉬며 벽에 걸린 가방 속에서 털장갑 한 짝을 꺼낸다. 검은색 바탕에 밤색 두 줄이 손등을 가로지른 장갑이다. 하경이 손수 떠 아빠에게 선물한 것이다.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다 외투 주머니에서 나온 장갑이다. 한 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짝 잃은 장갑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가방 속에 넣어둔 것이다. 이젠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는 부적이 되었다. 만지작거리던 장갑을 놓고 하경이 방문을 나선다.
하경의 자취방은 다세대주택의 옥상에 있다. 계단을 내려서는데, 오지랖 넓은 이웃집 개가 계단까지 와 짖는다. 평소에 늘 풀려있어서 성가시고 신경 쓰이는 개다. 하경의 얼굴이나 체취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여태 짖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멍청하거나 성격이 나쁜 개인 것 같다.
버스 창밖으로 익숙한 경치들이 지나간다. 시장, 한의원, 약국.
3개월 전, 인터넷으로 입사 지원해 면접을 치르고 방부터 구했다. 단양군은 군이라고는 해도 인구 3만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곳이다. 고시원은 당연히 없었고, 원룸은 보증금 300에 월세 30이었다. 100만 원도 안 되는, 그것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으로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빠의 사망 보상금과 위로금은 아파트 대출금 갚기에도 부족했다. 경매로 넘어가기 전에 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집을 팔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거리로 나앉을 수는 없었다. 그 집은 엄마를 위한 아빠의 선물이었다. 그 집으로 이사하던 날, 아빠는 벅찬 감정을 누를 수 없었는지, 맥주잔을 기울이다 목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급매로 내놓은 집은 얼마 안 가서 팔렸다. 집이 팔리던 날, 엄마는 이틀을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빠에게 의존적이던 엄마는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집을 팔고 나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사 갈 집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소형 아파트라고 해서 싼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집값을 올리기 위한 것이지,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젠 집도, 아빠도 엄마도 하경의 곁에 없다. 아빠의 죽음은 하경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짙푸른 물과 장대한 절벽들을 바라보며 하경이 한숨을 내쉰다. ‘하긴, 어쩌면 엄마는 처음부터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엄마에게는 엄마만의 삶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하경은 엄마에 대한 배신감을 억누를 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혹시 아빠가 살아있을 때부터?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지? 돈 때문에?’
아파트 대출금을 갚은 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생활비와 등록금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비록 작은 아파트였지만,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생활비라는 것이 그들에겐 없었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그 남자였다. 아빠의 친구. 엄마는 그 남자의 소개로 취직했고, 종종 남자를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하경에게 등록금을 내밀었다. 엄마의 월급으로는 단기간에 마련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하경은 엄마의 얼굴에 수표를 내던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냥 내가 사라지자.
하경이 내린 결론이었다.
희뿌연 햇빛이 아스팔트를 비추고 있다. 차를 주차하고 사무실로 가던 도미가 길가에 쪼그려 앉는다. 깨진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들풀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들풀의 생명력이 경이로우면서도 안타깝다. 언제든지 짓밟힐 수 있는 위험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들풀이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고속도로 요금소...
생각해본 적도 없던 곳이다. 1년이 넘어가고 있다. 좋게 생각해야지. 재밌잖아. 톨게이트 근무. 스릴도 있고, 사이코·변태들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혹시 알아? 또 다른 인연을 만나게 될지.
옆 톨게이트인 복주 요금소의 수연은 3년 넘게 봐온 손님과 결혼했다. 요금소를 지날 때마다 간식을 주던 남자가 어느 날 수연에게 꽃다발을 안겼다고 한다.
그런 인연이라면.......
김 씨?
미쳤구먼!
도미가 혼자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는다.
“도미! 뭐하셔?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제 막 도착한 지숙이 도미를 부른다. 갈색 바바리코트에 스카프로 멋을 낸 지숙의 모습이 화사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