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y rain Dec 22. 2021

[장편소설] 톨게이트 27.

27.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회복실 앞의 시간은 유난히 더디 흘렀다. 수술이 끝난 후에도 엄마는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하경은 기다리는 내내 초조함에 서성거린다. 이렇게 엄마를 잃을 수는 없다고 주문을 외우듯 다짐한다.

 운전자의 말로는 엄마가 옆도 보지 않고 무작정 길을 건넜다고 했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 불에서 빨간불로 바뀌는 시점이었다고 했다.

 휴대폰을 꺼내 엄마의 문자들을 다시 읽어본다. 마지막 메시지가 마음에 걸린다.

 「사랑하는 우리 딸아! 사랑하는 내 딸, 하경아! 하경이는 세상 누구보다도 강한 아이라는 것을 엄마는 알고 있어. 사랑한다.」

 전화를 받지 않자 지난밤 10시 12분에 보내 놓은 문자였다. 엄마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별을 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죽음을 예견했거나, 아니면 자살을 원했던 것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자신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자살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 미칠 것만 같다.

 엄마...

        


 시간은 밤을 지나 새벽이 되어 가고 있지만, 일엽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밤새 내리던 비는 그치고 안개만 남아 이리저리 휘돌아 다녔다. 무엇이 자신을 잠 못 들게 하는지,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개운치 않은 기분만은 분명했다. 자신이 '산'이라는 선계에 파묻혀 살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계속 이대로 살아도 될까?      

 언제 잠이 들었을까? 휴대폰 소리에 눈을 뜬다. 늘 새소리에 눈을 뜨곤 하던 일엽이 오늘은 새소리를 놓친 것이다.

 여보세요?

 9시가 넘어있다. 

 경일엽 경위님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방문한 톨게이트에는 지난밤의 요금소 직원이 먼저 와 있었다.

 “다시 뵙네요.”

 도미가 먼저 일엽을 맞으며 인사한다. 도미의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네. 좀 쉬셨습니까?”

 “아뇨. 못 쉬었어요. 그쪽도 못 쉬신 것 같네요.”

 도미가 일엽에게 커피를 내민다.  


 경찰의 질문은 집요하고도 세세했다. 도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범죄 용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도미와 일엽은 자신들의 행적과 동선, 관찰하거나 발견한 것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진술해야 했다.

 CCTV 확인 결과 뒤따르던 검은색 차는 사고 난 채 버려진 53 도 41X4가 맞았다. 그 차는 11시 34분부터 그곳에 정차하고 있었다. 무엇을 목적으로 그곳에 정차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수상한 차라고 경찰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또 한 대의 차는 톨게이트의 사각지대에 교묘하게 정차하다 빠져나갔기 때문에 CCTV에는 안 잡혔다. 하지만 범인의 얼굴은 CCTV가 사방에서 붙잡아놓고 있었다. CCTV를 인식하지 못한 범인은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드러냈고, 대놓고 범행했다. 범인은 며칠 전 교도소를 출소한 자였고 강간치사 전과가 있는 자였다.      

 “제 차로 가시죠.”

 일엽의 제안에 도미는 사양하지 않고 차에 오른다. 자신의 차가 버젓이 주차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엽의 차에 오른 것이다. 막상 차에 올랐지만 이내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이래도 되는 걸까? 팀장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이렇게 가증스러운 인간이었나? 남의 불행을 이용해 남자나 꼬시려고 하고.

 전에 없던 자신의 이중성에 수치스러움이 밀려온다.     

 “주말부부셨나 봐요?”

 말이 없던 도미가 진작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용기 내어 물었다.

 “네?”

 “휴직하고 여기 내려와 계시니까.”

 “아닙니다. 아직 미혼입니다.”

 “어머, 죄송합니다. 미혼이신 줄 모르고.”

 자제하려고 해도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도미가 진정하기 위해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묻는다.  

 “그럼, 본가가 이쪽이시군요?”

 “아닙니다. 잠시 쉴 겸 내려와 있는 겁니다.”

 “워낙 좁은 곳이고, 인구도 많지 않아서 방 구하기 힘드셨을 텐데.”

 “휴양림에 묵고 있습니다. 도락산 자연휴양림.”


 놈은 집요했다. 탈진상태에 있던 세윤이 가까스로 눈을 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젖은 수건처럼 매트리스 위에 늘어져있는, 자신의 모습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뒤이어 절망과 함께 슬픔과 공포가 밀려온다.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었는데, 깨어나 보니 현실이 악몽이었다. 차라리 악몽이라도 꾸고 일어났다면 이 정도로 절망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밖에서는 여전히 남자의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부상을 크게 당했든가, 아니면 놈들이 고문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린다.

 이들이 원하는 게 뭘까?

 죽이지도 않고 우리를 잡아두는 이유가 무엇일까?

 답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답이 밝혀지는 것도 두렵다. 아주 끔찍한 정답이 숨어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세윤이 절망에 몸서리를 친다.

 “일어났군.”

 차분한 음색의, 웃통을 벗은 오 사장이 칸막이 안으로 들어온다. 운동을 하다 들어왔는지 몸의 근육들이 불거져있고,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오 사장을 본 세윤이 다리를 오므리며 몸을 동그랗게 만다. 쇠줄에 묶인 한쪽 손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불을 끌어올 수도 없다.

 “추웠겠다.”

 오 사장이 이불을 끌어다 세윤에게 덮어준다.

 악마 같은 놈.

 이젠 공포보다는 증오가 치밀어 오른다. 간밤에 세윤에게 한 온갖 변태적인 악행이 떠올라 치가 떨린다.

 “걔 일어났어?”

 칸막이 뒤에서 똥파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 사장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똥파리가 고개를 들이밀며 방안을 탐색한다. 탐욕스러우면서도 구질구질해 보이는 똥파리의 면상을 본 오 사장이 험악한 표정을 짓는다.

 “오형, 나 좀 봐.”

 “이따가.”

 “아녀, 지금 봐야 혀.”

 똥파리도 물러서지 않고 버틴다. 똥파리의 고집에 오 사장이 일어나 칸막이 뒤로 나간다. 칸막이 뒤에는 처참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하체가 벗겨진 52조가 앉지도 눕지도 못한 자세로 새우처럼 몸을 말고 떨고 있고, 교통사고로 다친 배에서 흘러나온 피가 웃옷과 성기 주변에 눌어붙어있다.  

 “오형! 오형 좀 변한 것 같혀.”

 “뭐가?”

 “전엔 참 친절한 사람이었는데, 요샌 좀 아닌 것 같혀. 왜 그려?”

 “뭐가?”

 “저기, 저... 지지배는 마누라 삼을 건가?”

 “뭐?”

 “그렇지 않으믄 나도 좀 재미 좀 봐야 할 거 같은디?”

 “아직은 안 돼.”

 “왜? 왜 안 된다는 거여?”

 “김형한테는 쟤가 있잖아. 곱상하게 생긴 저놈.”

 “뭐여?”

 “왜? 딱 김형 취향 아닌가? 저런 놈 많이 갖고 놀았잖아.”

 “그런 벱이 워딨댜?” 똥파리가 언성을 높이곤 다시 말을 잇는다. “내가 저 지지배 델꼬 오느라 월매나 심들었는디. 그리고 저놈한테는 그게 없잖여.”

 똥파리가 손짓으로 가슴모양을 만들며 애절하고도 비굴하게 웃는다.

 “나중에. 나중에 놀게 해 줄게. 아니면 더 좋은 애로 하나 구해주든가.”

 “아녀! 싫어. 난 꼭 저 지지배랑 그거 할 것이구먼. 오늘 안으로다가 꼭 저 지지배 구녕에 넣고 말 것이여!”

 천박한 새끼! 똥파리가 징징대며 떼를 쓰자 살의가 인다. 하지만 오 사장은 똥파리를 달랜다.

 “그러지 말고. 내가 하나 구해주지. 더 예쁜 애로. 세상에 널린 게 여잔데, 어때 나가서 하나 골라볼까?”

 “싫구먼! 난 꼭 저 지지배를 먹고 말 것이라니께. 애당초 저 년을 고른 것도 나였잖여!”

 “걔 아냐.”

 “뭐여?”

 “김형이 고른 애 아니라고.”

 “그럼 쟨 누구여?”

 “모르지. 암튼 쟨 아냐.”

 “그년이든 아니든 상관웂어. 젖 하고 보지만 있으믄 되니께.”

 “그래, 알았어.”

 똥파리가 눈을 부릅뜨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오 사장이 한발 물러선다.

 “참말이지? 나도 쟈랑 그거 할 수 있는 거지?” “근디 오형은 어째 쟈를 혼자만 차지하려고 그러는거여?”

 “다 쓸데가 있어서 그러는 거야. 길들이는 거야.”

 “질들이는 거?”

 “응.”

 똥파리에게 대답을 한 후 오 사장이 잠시 골똘해진다. 확실히 저 계집은 다른 것들과 다른 점이 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는 것. 저 계집은 애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질질 짜지도 않았다. 게다가 강간을 당할 때도 다른 것들과는 달랐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는 것 같았지만, 일단 체념을 한 후에는 비교적 잘 따라주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극도의 겁쟁이이거나, 아니면 아주 영리한 계집인 것. 둘 다 괜찮다. 극도의 겁쟁이는 비겁하기 때문에 조금만 겁을 줘도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고, 영리한 계집은 빠른 계산 속으로 제 처지를 금방 파악하기 때문에 부려먹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란디 질은 왜 오형만 들여야 하는 거여? 나도 질 들이믄 안 되까?”

 “안 돼.”

 “왜?”

 “다 생각이 있어.”

 “무슨 생각?”

 “몰라도 돼!”

 “씨발! 시방 나 무시하는 것이여?”

 느닷없는 욕설에 화가 난 오 사장이 똥파리를 노려본다.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의 소리를 먹어치운다.

 “아, 왜 그러는디?”

 제어 불능의 문제아처럼 씩씩대는 똥파리를 노려보던 오 사장이 표정을 바꾼다.

 “오늘 밤부턴 김형 거야. 그다음엔 죽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정말? 정말이지?”

 똥파리가 소풍 전날의 아이처럼 들떠하며 기뻐한다. 똥파리를 뒤로하며 몸을 돌린 오 사장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이전 11화 [장편소설] 톨게이트 26.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