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조의 얼굴을 본 순간 세윤은 만감이 교차했다. 반가움과 슬픔, 기쁨과 절망이 소용돌이쳤다. 52조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뒤쫓아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52조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이곳을 살아서 나가야겠다고 세윤이 결심한다.
세윤의 얼굴을 본 52조도 경악했다. 52조 역시 만감이 교차했다. 분노와 절망, 후회와 희망, 기쁨과 슬픔이 가슴을 후벼 팠다. 납치된 여자가 하경이 아니라는 것은 기뻤지만, 이런 꼴을 자초한 자신의 아둔함에 절망했다. 52조도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겠다고 결심한다.
어둠에 익숙해진 세윤이 주위를 살핀다. 컨테이너 박스는 생각보다 넓었다. 각목이나 쇠파이프 등 자질구레한 것들이 널브러져 있고, 한쪽에는 물통과 의자도 있었다. 칸막이 뒤쪽에는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운전을 하던 놈이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안에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팔을 당기자 벽에 걸린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오른팔을 당기자 왼팔이 달려 올라간다. 구멍에 쇠사슬을 끼워 양쪽으로 묶은 것이다.
세윤이 절망한다. 쇠사슬이라니! 영화에서나 본 장면인데. 노예나 인질, 사냥감.... 끔찍한 생각을 피하기 위해 세윤이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가 추레하게 생긴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나이는 많아 보이지 않지만, 젊음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다. 어려서부터 늘 노안을 유지했을 것 같은 얼굴이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세윤이 눈을 감아버린다.
똥파리가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드러난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자 세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린다.
“왜 그래? 아저씨가 치료해주려고 허는 것인데.”
똥파리는 자신의 어투가 맘에 들어 기분이 좋다. 목소리도 저음으로 깔리며 근사하게 들린다. 세윤이 똥파리에게서 멀어지려고 발을 버둥거린다. 그럴수록 똥파리가 징그러운 미소를 띠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세윤이 눈물 너머로 52조를 바라본다. 52조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52조 앞에서 험한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
“좀, 가만있어봐. 이놈의 지지배야! 내가 잘해줄려고 그러는 건디, 왜 그려? 가만 좀 있어봐라, 이놈의 지지배야! 어허!”
똥파리가 세윤의 스타킹과 팬티를 벗기는 동안 52조가 침을 삼키며 그들을 바라본다. 자신도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52조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알릴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똥파리의 어투가 다시 사투리로 변한다. 똥파리는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 “왜 이려? 씨발!”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따진다.
“아직 걔 건드리지 마.”
“왜 또? 오형이 먼저 할려고 그러는 거여?”
대답 없는 오 사장이 똥파리를 노려보며 눈을 부라린다. 잠시 대치하던 똥파리가 꼬리를 내리며 일어선다.
“그려. 알았어. 먼저 혀, 먼저 혀! 난 아무 상관웂구먼.”
똥파리의 승복을 받아내고도 오 사장은 분이 안 풀리는지 계속 똥파리를 쏘아본다.
“비켜!”
도장이라도 찍듯 눈빛으로 똥파리를 찍어 누르며 오 사장이 명령한다.
“그려. 그려, 그려.”
똥파리가 비켜서며 고개를 끄덕인다. 똥파리가 비켜서자 오 사장이 쇠사슬을 풀고 세윤을 안아 올린다. 겁에 질려 울음도 울지 못하던 세윤이 울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지 마누라 대하듯기 하네.
똥파리가 입속으로 우물거린다.
“울지 마.”
세윤을 매트리스 위에 내려놓고 오 사장이 타이른다. 세윤이 겁먹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 얼굴을 보고 놀란다. 잘 생겼다. 남자의 얼굴이 세윤을 안심시킨다. 남자의 말끔하고 지적인 얼굴은 비열한 짓이나 잔인한 짓을 할 것 같지 않았다. 남자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공간에는 쇠로 된 작은 격자 창문이 있었고, 가스난로가 방안을 데워주고 있었다. 남자가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세윤의 다리를 닦기 시작한다. 남자의 의도를 몰라 당황스럽고 두렵지만 세윤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지 않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남자의 다독임에 세윤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세윤이 소리를 내며 할 말이 있다는 표시를 하자 남자가 세윤의 입에서 테이프를 떼어낸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묻고 싶은 말도 많을 테고. 그렇지만 한 가지는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소리 지르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곤란해. 그렇게 되면 재미없을 테니까. 알겠지? 그렇게 할 수 있지?”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하고 싶지만 세윤은 대신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살려달란 말조차도 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잘 생긴 남자의 얼굴이 언뜻언뜻 냉혹해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좋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좋겠다. 난 묻는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 묻는다는 것은 곧 반기를 드는 것이니까. 넌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돼. 알겠지?”
밖에서 52조의 비명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똥파리가 그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찬 세윤이 몸서리를 치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착하다. 어떻게 내가 더 닦아줘도 되겠니?”
세윤이 갈등한다. 남자는 묻고 있지만, 세윤에겐 선택권이 없다.
“괜찮다고? 그래. 깨끗이 닦아야지.”
세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남자가 제멋대로 대답하며 미소 짓는다. 다리 위에 놓여있던 남자의 손이 더듬으며 위로 올라온다. 세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어떻게 해야 이 악몽을 빨리 끝낼 수 있을까? 세윤은 알 수 없다.
샤워 후 머리를 말리는데 으슬으슬한 한기가 올라온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춥기에는 이른 계절이지만 비 맞는 것도 모르고 뛰어다녔기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것이다. 샤워 전, 지숙에게 전해 들은 고속도로 사무소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영업소는 비상상태로 들어갔고, 요금소는 통제되었다. 소장을 비롯해 전 직원이 대기상태로 들어갔다. 연락을 받고 온 사장 부부는 자기 딸을 요금소에 내보낸 소장의 멱살을 잡고 난리를 피웠다. 부모 된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딸은 되고 자기 딸은 안 된다는 심보가 맘에 안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쁜 생각을 지우기 위해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감자, 바닥의 온기가 몸을 노곤하게 풀어준다.
팀장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의 몸이 따뜻함에 익숙해질수록 팀장이 걱정된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도살된 짐승처럼 끌려가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소름이 끼친다.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미워하지 말걸.
도미가 후회와 한숨을 곱씹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까, 막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