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길을 나선 도미가 행선지를 바꾼다. 도서관을 가기 위한 직진이 아닌 우회전. 밤새도록 생각하고 망설였지만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엄마의 자살 시도 이후 하경은 요금소 일을 그만두었다. 엄마를 옆에서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성우의 말에 의하면 하경의 엄마는 하경에게 보험금을 남겨주고 싶어서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 했다. 자살을 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하경 엄마는 몰랐던 것이다.
세윤의 병실 앞에서 도미는 또 한 번을 망설인다. 미워하기 때문에 마음이 더 쓰인다는 것을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잠시 병실 앞 복도에 앉아있던 도미가 발길을 돌린다. 역시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때론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요금소 생활 2년 동안 도미는 자신이 아주 많은 것을 깨달아버린 느낌이 든다.
차에 시동을 건 도미가 결심을 한 듯 밝은 표정이 되어 출발한다. 도미가 향한 곳은 도락산 휴양림이다.
“안녕하셨어요?”
전화를 하자 일엽이 주차장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일엽의 차림새로 봐서 딱히 마중 나와 있었다기 보단 어딘가로 외출하려던 모습 같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침 햇살 아래 서있는 일엽의 얼굴이 맑게 빛을 냈다. 도미는 그 빛을 받아 자신의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느낀다.
“죄송해요. 느닷없이. 혹시 약속이 있으신 건 아닌지.”
“아니요. 산에 가려던 길이었습니다.”
“산에 사시면서 또 산을 가세요?”
“산세도 익히고 청소도 하려고 가는 겁니다. 환경정비 같은 겁니다.”
“굳이 왜 그런 일까지?”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어차피 오래 있지도 못하니까 단양에 있는 산들은 다 가 보려고요.”
“아, 그러시구나. 오늘은 어디로 가세요?”
“요 뒷산으로 올라가 보려고 합니다.”
“뒷산이면 도락산이요?”
“아뇨. 알려지지 않은 산입니다. 유명하지 않아서 인적도 드물고, 그래서 관리가 더 필요한 산입니다. 저라도 자주 가서 돌봐주려고요.”
“저도 가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
늘 가까이에 있어서 식상하기만 했던 산이 달라 보인다. 물론 가을의 절정인 10월 말이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도미는 자꾸 가벼워지는 발걸음을 애써 억제해야만 했다. 도락산과 이웃하고 있는 금수산은 멀리서 보면, 산 능선이 마치 미녀가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미녀봉'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활엽수와 침엽수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어, 장식을 해 놓은 듯 아름다웠고, 오밀조밀한 바위들이 등성이마다 자리 잡고 있어 멋이 있었다. 어찌 보면 기암괴석의 장대한 산을 분재해놓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도미는 단양에 살고 있으면서도 산을 가 본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손잡아 드릴까요?”
꽤 가파른 바위를 오를 때 일엽이 손을 내밀었다. 순간 도미가 당황하며 갈등한다. 운동으로 다져진 자신에게 이런 산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네, 감사합니다.”
손을 내밀면서도 도미는 자신의 내숭이 소름 끼칠 정도로 쑥스럽다.
“운동 많이 하시나 봅니다.”
“네?”
내숭을 들킨 것 같아 도미가 당황한다.
“산에서 살고 있는 저보다 산을 더 잘 타셔서.”
“아니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렇게 헉헉 거리는데요.”
도미가 헉헉거리자 일엽이 물을 내민다. 갑자기 들이킨 찬물에 도미가 캑캑댄다. 평상시의 도미는 씩씩했고, 어디에 내놔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력이 있다고 자신을 자부해왔다. 뿐만 아니라 내숭 부리는 여자들을 경멸해왔는데, 일엽 앞에서 내숭 부리며 약한 척을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돌아버릴 지경이다.
“운동을 하긴 해요.”
“그렇죠? 무슨 운동 하시는데요?”
일엽이 자신의 예측이 맞은 것에 대한 기쁨을 나타냈다.
“태권도하고 무에타이요. 헬스도 좀 하고.”
“어쩐지! 운동 많이 하신 분 같아 보였습니다.”
일엽이 감탄을 하며, 딱 봐도 알겠다는 표정을 드러낸다. 일엽의 표정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왠지 부끄럽다.
“그런데, 왜? 무슨 계기라도 있습니까? 체대 출신이십니까?”
“아뇨. 어렸을 때부터 해 와서. 꿈이 경찰이었거든요. 지금도. 지금은 꿈이 아니라 경찰공무원 준비생이지만요.”
“그러셨습니까? 왜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그냥. 뭐....”
“하긴, 아무한테나 꿈을 얘기하진 않죠.”
‘아무한테나’라는 말에 서운함을 느끼며, 도미는 ‘아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 이젠 일을 하러 가실까요?”
“네. 무슨 일부터 하죠?”
“쓰레기를 주우며 내려가면 됩니다. 쓰레기들은 대부분 등산로가 아닌 풀숲에 버려져 있으니까 우리는 풀숲을 뒤지면서 내려갈 겁니다. 고생되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하긴! 도미 씨라면 걱정 없겠네요.”
“네.”
산의 보이지 않는 곳엔 쓰레기가 많았다.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에 찾아온 사람들이 왜 쓰레기를 버리고 갈까? 몸과 마음을 정화하려고 산을 찾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는 것이 도미로서는 상상이 안 갔다. 물병, 술병, 종류도 다양한 각종 음료수병, 캔, 과자봉지, 종이, 휴지, 과일 껍질 등 없는 것이 없었다. 하강을 하며 주운 쓰레기가 산의 중반부를 지날 즈음엔 비닐봉지에 가득 들어찼다. 일엽이 모아진 쓰레기들을 배낭에 넣고 다른 비닐봉지를 준비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도미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득했다. 일엽을 또 볼 수 있을까? 일엽이 자신에게 연락해줄까?라는 생각에서부터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까지.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다 잘 될 겁니다.”
“네?”
도미가 깜짝 놀란다. 자신이 생각들을 입 밖으로 내뱉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당황한다.
“도미 씨가 하고 있는 고민, 저도 많이 했습니다.”
“무슨 고민....”
“공무원 시험 준비요. 우선 도미 씨는, 체력은 당연히 합격이고, 성격이나 정의감도 투철하니까 면접에서 떨어질 일도 없을 겁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십시오. 수험서는 제가 조언해드리겠습니다.”
“네.”
모든 고민이 한꺼번에 해결된 것 같아서 도미는 무척 기쁘다.
“벨소리 듣기 좋은데요.”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일엽이 말했다.
“네?”
“도미 씨 벨소리 아닙니까? 엄마가 섬 그늘에.” “아닌데요. 벨소리가 들려요?
“네, 도미 씨 뒤쪽에서. 자장가를 연주한 것 같은데....”
“그래요? 어디에서....?” 도미가 주위를 둘러보며 귀를 기울인다. “아! 들리네요.”
“잠깐!”
일엽이 심각한 표정으로 풀숲을 뒤진다. 산악 구조대원의 예감으로 조난을 직감한 것이다. 음악소리는 끊겼지만 일엽이 풀숲을 헤치며 낙엽을 헤집는다.
“누가 휴대폰을 떨어뜨렸나 봅니다. 누군지 몰라도 운 좋은 양반이네요. 우리가 여기 왔으니 다행이지.”
“그러게요. 아무나 받으라고 계속 전화했나 보네요. 잃어버린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아직도 소리가 울리는 걸 보면.”
풀숲을 헤치고 나가자 산 밑에 너른 풀밭이 나타났다. 키 큰 침엽수들로 둘러싸인 제법 널찍한 공터다.
여기 있네요.
일엽이 휴대폰을 주워 든다.
“어머! 정말 있었네요. 벨소리도 끊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으셨어요?”
“산악구조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가끔 있습니다. 휴대폰이나 카메라 잃어버렸다고 찾아달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요? 그럴 땐 다 찾아주나요?”
“카메라는 힘들고. 휴대폰은 이렇게 벨소리가 울리면 찾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도 찾기 쉬운 경우나 그럴 수 있죠. 휴대폰에 저희 목숨을 걸 수는 없으니까요.”
“못 찾아주면 서운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네요.”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못 찾았어도 고맙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네...”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아직까지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도미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금소 생활하다 보면 진상인 사람들도 많이 만나죠?”
“네. 그래도 일엽 씨 말씀처럼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요.”
휴대폰에 묻은 흙과 낙엽을 떼어내던 일엽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왜 그러세요?”
일엽이 손수건을 꺼내 휴대폰을 감싼다.
“피가 묻어있습니다.”
말을 하며 일엽이 주변을 탐색한다. 휴대폰 주인이 부상을 입어 쓰러져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휴대폰이 떨어져 있던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져지지 않은 땅이 눈에 띈다. 흙이 흩어져 있고, 땅을 팠던 흔적이 있다. 흙 주변엔 흐려져 가는 발자국들이 찍혀있다.
“무슨 일일까요?”
일엽을 따라 휴대폰과 주변을 살펴보던 도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그때 휴대폰 벨이 다시 울린다.
「우리 집」
이란 문자와,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떠오른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엽이 망설인다. “이리 줘 봐요.” 자장가가 계속되자 도미가 손수건에 싸인 휴대폰을 가져간다.
도미가 통화를 드래그하자 목소리가 튀어나오며 반가움을 전한다.
엄마?
이제 막 아기에서 벗어난 것 같은 아이의 여린 목소리가 엄마를 부른다.
“여보세요!”
엄마! 엄마! 왜 안 와? 준희 생일에 왜 안 와?
발음이 덜 여문 아이가 애타게 엄마를 찾고 있었다.
여보! 여보! 준희 엄마! 윤하야!
느닷없이 등장한 남자의 절박함에 대답할 엄두도 못 내고 머뭇거리던 도미가 휴대폰을 일엽에게 건네지만 휴대폰은 마지막 소리 이후 방전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신고해야 될 것 같네요.”
일엽의 목소리가 심각해진다.
*2014년에 쓴 글을 이제야 세상에 내놨습니다. 그동안 등장인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마치 못난 부모를 만나 제대로 성장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자식을 대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배경이 되는 고장을 지날 땐 가슴이 쓰리기도 했습니다. 어찌 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