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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y rain Jan 01. 2022

[장편소설] 톨게이트 34.

34.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문을 연 세윤이 52조를 돌아본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지만, 눈물을 흘릴 시간도 없다. 52조의 부상이 심하기 때문이다. 세윤이 낸 상처들은 위험할 것이 없었고, 상처도 깊지 않았다. 하지만 피로 얼룩져 있는 배와 부러진 다리가 심해 보였고, 염증 탓인지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52조의 쇠사슬을 풀고 입에 붙은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오랫동안 붙어있던 테이프가 늘어지며 52조의 입술 피부를 뜯어먹는다. 담요를 가져다 52조의 벗은 몸에 덮어준다. 불덩이 같은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요! 정신 차려 봐요. 이렇게 죽으면 안 돼요. 나랑 같이 나가요. 이봐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52조를 흔들어 깨운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52조의 입에 물을 대준다. 그러자 52조가 입술을 움직이며 앓는 소리를 낸다. 세윤이 52조의 몸을 부둥켜안아 밖으로 끌어내려 애쓴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52조는 움직일 줄을 모른다. 대신 헛소리처럼, 신음처럼 어떤 단어를 연신 웅얼거린다.

 “뭐라고요?”

 52조의 머리를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세윤이 말을 알아듣기 위해 애쓴다. 실신상태인 52조가 염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가까스로 52조의 말을 알아들은 세윤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52의 머리를 획, 밀쳐버리고 컨테이너 박스 밖으로 나간다.


 문밖에서 벤츠를 발견한 세윤이 땅바닥에서 막대기를 주워 들곤 다시 들어가 오 사장의 옷을 헤집는다. 막대기의 끝으로 묵직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버려져있던 비닐봉지를 손에 감고 조심조심 오 사장의 주머니에 손을 넣자 열쇠가 걸려 나온다. 자동차 키를 손에 넣은 것이다. 다시 밖으로 나가려다, 정지한 듯 멈춰서, 물끄러미 52조를 바라본다.

 잠시 고민하던 세윤이, 사나운 기세로, 52조에게 덮어줬던 담요를 벗겨 자기 몸에 두른다. 그리곤 미련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간다.


 경찰이 세윤을 구조한 것은, 성진 마트 주인이 오 사장의 인상착의를 신고하고도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경찰은 성진 마트 주인의 제보에 따라 인근 산과 외진 곳을 뒤졌고, 산을 벗어나 피투성이 발로 국도변을 걷고 있던 세윤을 발견한 것이다. 자동차 키의 일부분이 염산에 녹아 세윤은 벤츠를 탈 수 없었던 것이다.     

  


 신경안정제와 진정제를 맞고 잠든 세윤은 이제야말로 진짜 악몽에 시달리며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해 병실이 떠나가라 악을 써댔다. 세윤의 부모는 어쩌다가 세윤이 이렇게 됐는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잘못되어 세윤이 이런 꼴을 당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보고 ‘내 탓이오’를 해 봐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범죄현장에서 엉겨 붙은 시체 두 구와 죽어가는 남자를 발견한 경찰이 현장을 수습하고 세윤에게 물었다.

 “힘드시겠지만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세윤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죄송합니다만, 거기 죽어있던 둘이 범인 맞습니까?”

 그렇다고 세윤이 대답했다.

 “그럼 다른 한 명은 어떤 관곕니까? 그 남자도 공범입니까?”

 잠시 망설이다 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경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가고 난 후 다시 깊은 잠 속에 빠져든 세윤은 하나 둘,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하나만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죽어가면서도 중얼거리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하경이, 하경이......

 잠에 빠져서도 세윤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8년을 한결같이 이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부표 위에 앉은 것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게다가 도미도 하경도 돌아오지 않는 톨게이트는 쓸쓸하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받은 고객이 지숙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농장에서 사과를 따왔는데 좀 드릴까요?”

 “네?”

 당황한 지숙이 뒤차를 살핀다. 석 대의 차가 늘어서 있다. 다행히 빵빵거리는 차는 없었다.

 “이것 좀 받으세요.”

 지숙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객이 차창으로 사과를 건넨다. 사과 두 알, 한 알, 또 두 알. 모두 다섯 알의 사과를 받으며 지숙은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한다. 사과를 못 사 먹을 형편도 아닌데, 제철이기 때문에 사과가 비싸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고마운지 지숙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고맙게 잘 먹겠습니다.”

 “아니에요. 고생하시는데.”

 라고 말하며 떠나는, 고운 얼굴의, 아이 엄마를 배웅하며 지숙이 다음 차를 맞는다. 고맙고 행복한 여운을 오랫동안 즐기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사과 맛있겠네요.”

 통행권을 내밀며 맘 좋은 미소를 건넨 중년 남자에게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내민다.

 “감사합니다.”

 친절한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지숙이 다음 차를 기다린다.      

 77버 84XX.

 “씨발! 바쁜데 왜 이렇게 노닥거려?”

 “죄송합니다. 손님께서 뭘 좀 주셔서.”

 “누가 아줌마한테 변명하래? 빨리빨리 좀 해.”

 “네. 바쁘신 일이 있으신가 봐요.”

 “그건 아줌마가 상관할 거 없고. 가만있어봐. 아줌마 나한테 시비 터는 거야? 내가 좀 뭐라고 했다고 따지는 거야?”

 “아이고, 고객님, 절대 아닙니다.”

 지숙이 밝은 미소를 보이며 두 손으로 거스름돈을 내민다.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봐 공손하게 받쳐 남자의 손에 준다.

 “씨발! 왜 남의 손을 만지고 지랄이야? 더럽게! 아줌마, 성추행으로 깜빵 가고 싶어?”

 “아닙니다. 돈 떨어뜨릴까 봐 두 손으로 드렸습니다.”

 “썅! 거지 같은 년이 재수 없게.”

 “뭐?”

 지숙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소리친 후 지숙이 숨을 고른다.

 “이 씨발년이! 너, 지금 나한테 반말했냐?”

 “고객님! 이제 그만 가세요! 네? 돈 받았으면 그만 가란 말이야, 이 고객 새끼야!”

 “이런, 씨발!”

 남자가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낌새를 보이자 지숙이 창구 유리를 닫는다.  

 “고객님이 지껄이고 있는 말, 행동 다 CCTV로 실시간 모니터링되고 있거든! 이제 곧 경찰이 올 텐데, 어떻게? 만나고 가시겠습니까?”

 “씨발! 나, 열 받네. 어휴! 너, 밤길 조심해라!”

 창구를 주먹으로 내지른 남자가 손이 아픈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감싸 쥐곤 씩씩거리다 차를 타고 내뺀다. 놀란 가슴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다음 차가 와서 선다.      

 68도 30X7.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웃으며 대답을 해야 하는데 지숙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을 모른다. 8년 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이다. 지숙의 눈치를 보다 조용히 거스름돈을 받고 68도가 떠나자 지숙의 창구로 서 팀장이 다가온다. 서 팀장의 눈치를 보며 공익요원이 지숙의 요금소 입구에 차단막을 세운다.

 “무슨 일입니까?”

 대답이 없자 서 팀장이 혀를 차며 말을 잇는다. “좀 참으시지, 왜 고객한테 말대꾸를 해서..... CS평가면 어떡하려고.”

 구시렁거리는 서 팀장의 말에, 지숙이 요금소를 박차고 나와, 명패에서 자신의 이름 빼내 서 팀장 앞에서 찢어버린다.

 “내가 어디 가서 무슨 일은 못 하겠어? 이런 일도 8년씩이나 했는데!”



 톨게이트도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의 소설을 계속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이제 2회 분량이 남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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