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줘 보지만 눈 뜨는 것이 쉽지 않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조차도 흐릿하다. 손이라고 생각되는 곳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감각이 없다.
비…….
6월이었다. 초록의 기운에도 끈적임이 배어 있는 더운 날씨였다.
산행은 순조로웠다. 나무들은 빛의 방향과 조도에 따라 색깔을 바꾸었다. 물오른 나무들이 발산하는 향기가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산의 중턱을 오를 무렵부터였다.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빛을 입고 서 있던 나무들은 어두컴컴한 대기에 파묻혀 음산함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고, 높은 소리로 노래하던 새들은 화드득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자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가 있으니까.
그들은 산행을 멈추지 않았다. 흐리다가 말겠지, 했기 때문이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려도 그들의 낙천성은 멈추지 않았다. 몇 방울 뿌리다가 말겠지, 했다. 둘이 함께였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비는 굵은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흩뿌리던 비는 큰 키의 나무들을 거치면서 손가락 두께만큼 굵어져 그들을 몰아붙였다. 그들은 산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가차 없는 빗방울에 여자의 얇은 셔츠는 금방 힘을 잃었고, 여자의 얼굴은 붉어졌다. 여자가 셔츠를 몸에서 떼어 잡아당겼다. 팽팽해진 셔츠는 가슴의 봉긋함은 가려 주었지만 붉어진 얼굴까지 가려 주진 못했다.
여자를 외면하고 있던 남자가 돗자리를 펼쳤다. 여자는 궁금했다. 왜 돗자리를 폈을까? 이렇게 비도 많이 오는데…….
남자가 펼친 돗자리를 여자에게 덮어 씌웠다. 여자의 몸 하나가 돗자리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돗자리 속은 아늑했다. 비옷처럼 돗자리를 덮어쓴 여자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도 미소 지었다. 남자가 여자의 돗자리를 여며 주었다. 남자의 손길 속에서 평온함을 느끼던 여자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오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작아지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돗자리를 열어 그를 들여 주었다. 미소를 띠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무표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남자의 무표정을 보며 여자가 미소 지었다. 남자는 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술이 여자에게 다가왔다.
투두둑 투두둑. 굵은 빗방울들이 돗자리를 두드렸다.
툭! 투두둑! 빗방울들이 아무리 세차게 두드려대도 여자는 행복했다. 그가 함께 있으니까.
국도로 가고 싶었다. 마티즈는 항상 국도가 좋았다. 조금은 돌아가도 괜찮았다. 들판 사이에서 홀로 정겨운 촌락을 지나는 것도 좋았고, 예기치 못한 커브를 도는 것도, 불현듯 나타난 짐승 같은 기암괴석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개의 강을 만날 때도 있었고, 들이치는 파도의 분무 속을 달릴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경치들은 말했다. 아름다움은 이런 것이다. 어느 것 하나 같을 수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것. 아름다움이란 의지와 상관없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오늘은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국도는 돌발 상황이 많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남편의 말을 존중해서다.
1년째다. 이 길을 오간 것은. 때론 남편이. 때론 여자가.
주말부부라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은.
어느 날, 남편은 안동으로 내려갔다. 은행원인 남편은 승진을 위해서 갈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여자는 알았다. 그들이 헤어지지 않기 위해선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흔히 말하는 여자 문제, 도박, 음주. 그런 것들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편의 성격상.
사랑이라는 것은 징후나 예후 없이 천천히 식어 가는 것이다. 아이가 없는 부부에겐 특히. 저녁을 먹고 나서도 할 일이 없는 것. 멀뚱하게 앉아 눈에도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TV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 그러다가 같은 침대로 들어가지만 각자 따로 자는 것. 그게 바로 식어버린 찬밥 같은 사랑인 것이다.
90 - 95 - 100km.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속도계를 밀어 올려 본다.
완만한 각도를 유지하던 속도계가 주춤하더니 내려가기 시작한다. 버스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사이드미러를 들여다본다. 검은색 차 한 대가 뒤에서 달려오고 있다. 맹렬하지만 거리는 충분하다. 차선을 바꿀 수 있다. 마티즈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꿔 속도를 높인다. 그러다가 흠칫한다. 검은색 차가 바짝 뒤따라와 있다.
빠앙!
신경질적인 경적이다. 차는 검은색. 벤츠다.
여자가 액셀을 밟는다. 하지만 속도가 쉽사리 오르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속도를 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빵!
머리채가 당겨지는 것 같은 불쾌함이 느껴진다. 허겁지겁 오른쪽 깜빡이를 켠다.
오른쪽으로 차선을 옮기려던 마티즈의 핸들이 휘청거린다. 어느새 저속 차선을 점령한 벤츠가 그르렁거리며 기계음을 내고 있다. 마티즈는 차선을 바꿀 수 없다. 앞이 텅 비어 있지만, 벤츠는 앞으로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마티즈 옆에 붙어 있을 뿐이다.
마티즈가 속도를 높여 본다. 벤츠는 그대로 마티즈 옆에 몸을 밀착시킨다. 불안한 몸짓의 마티즈가 속도를 더 높인다. 벤츠도 역시 속도를 높인다.
빵빵!
벤츠에 신경 쓰는 동안 따라붙은 은색 아반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질을 낸다. 의기소침해진 마티즈가 속도를 더 높인다.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110 - 120 - 130km.
벤츠도 속도를 높인다. 110 - 120 - 130km. 마티즈와 연결된 계기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마티즈가 벤츠를 쳐다본다. 벤츠는 검은 속을 보여 주지 않는다.
백미러 속에 바짝 붙어 있던 성급한 아반떼가 벤츠의 뒤로 차선을 바꾼다. 하지만 벤츠는 요지부동. 아반떼가 다시 마티즈를 몰아 댄다.
무섭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적개심에 불타 있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고요하기만 한 남편도 운전대만 잡으면 이상한 흥분 상태에 놓였다. 틈만 나면 그들은 속도 경쟁을 벌였고, 약간의 허점만 보여도 죽일 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들에게 차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무기다.
아반떼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 마티즈가 경고용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 본다.
빠앙!
아반떼의 대답이다.
어떻게 하지?
벤츠 앞으로 나설 자신은 없다. 마티즈가 속도를 높이면 벤츠도 속도를 높일 것 같다. 벤츠는 마티즈를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사냥개 같다.
궁리 끝에 마티즈가 오른쪽 깜빡이를 켜며 속도를 줄인다.
빵! 빠앙!
아반떼가 신경질을 내며 소리를 지른다.
야, 이 미친년아! 거기서 왜 속도를 줄이고 지랄이야? 하는 것 같다. 울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아반떼의 신경질이 극에 달했는지 다시 한번 소리를 내지른다. 겁먹은 마티즈가 급발진한다. 아주 잠깐, 벌어진 간격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아반떼가 벤츠의 앞을 박차고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