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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y rain Jan 05. 2022

중앙고속도로 2.

2. 벤츠와 아반떼

 벤츠와 아반떼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는 목적지가 있다. 그들은 현재에 있지 않다. 목적지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재는 속도와 함께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때론 목적지가 바뀔 수도 있다. 미래가 아닌 현재로. 또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냄새다. 여자를 깨운 건. 비릿한 냄새.

 여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심지어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뜨고 있는 것인지조차도 의식할 수가 없다.

 여자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버스 안이다. 

 길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를 좇고 있는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생각이란 건 애당초 없었다. 반응일 뿐이다. 그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     


 어둠…….

 나는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일까?     


 눈꺼풀을 만져 보려 하지만 만질 수 없다.


 그가 걷는다. 버스를 따라.

 버스를 탄다. 하나, 둘, 셋.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온다. 그가 선다. 여자 앞에.

 여자는 얘기한다. 맘속으로.

 안녕하세요? 저 모르시겠어요? 아니다. 그렇게 얘기할 순 없다.

 가방 들어 드릴까요? 그것도 아니다.

 뭐라고 말을 걸까? 길을 물어볼까?

 여자의 시도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맘속을 어지럽혀 놓기만 할 뿐. 먼 눈길로 창밖만 바라본다. 유리창 속에 그의 모습이 있다.

 시간이 흐른다.

 여자가 일어선다. 내릴 곳은 이미 지나쳐버린 후이다. 남자는 여자가 일어설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준다.

 문이 열리지만, 여자는 내리지 않는다. 다시 두 정거장을 지나친다.

 벨을 누른 후 여자가 남자를 본다.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여자가 신발 뒤축으로 남자의 발을 밟는다. 남자가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얼굴을 찌푸리지만, 여자는 그냥 내린다.

 버스에서 내린 여자가 자리에 선 채 버스 속의 남자를 올려다본다. 야속함을 담아 쏘아보는 눈빛이다.

 버스가 움직인다. 쏘아보던 눈길이 체념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다섯 걸음도 채 걷기 전에 버스가 다시 선다.

 남자가 내린다.

 여자는 흘낏 남자를 보지만, 마음과 달리 걸음이 빨라진다. 

 이봐요! 발을 밟았으면 미안하단 말 한마디쯤은 하고 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하길 기다린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무작정 여자의 손을 잡고 걷는다. 

 “다음부턴 이거 신고 밟아요.” 

 여자의 발엔 하이힐 대신 흰색 캔버스화가 신겨 있다.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도 웃는다.           


 고속도로 통행권을 뽑으려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린다. 포자를 터트린 앞차의 매연이 차 안으로 급작스럽게 밀려들어온다. 벤츠. 

 운전 드럽게 하는군. 

 통행권을 뽑은 남자가 부드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은색 아반떼 XD. 길이 잘 들여진 차다. 소리 하나 없이 미끄러진다. 이제 막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새 차나 다름없다. 보닛에도 티끌 하나 없다.

 커브를 돌아 고속도로 입구로 등장한 아반떼가 왼쪽 깜빡이를 켜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산타페… 소나타… 트럭… 렉스턴… 트럭… 버스… 토스카…….

 추월할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

 차는 고속도로에서 길을 들여 줘야 한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주기도 해야 막힘이 없어진다. 여자처럼 주기적으로 뚫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반떼가 막힘없이 질주한다. 팽팽한 고무줄 끝에 매달려 있었던 것 같다. 아반떼의 탄성을 즐기며 카오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탁한 고음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뿜어져 나온다.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왕성해진다. 그와 함께 찾아오는 여유. 절대 강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이다. 적어도 스피드에선 나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쪽 입가를 씰룩이며 웃는다. 액셀을 밟는 남자의 발에 힘이 들어간다. 

 트럭 3대 제끼고, 스포티지 제끼고, 버스 통과!

 스피디한 음악과 함께 스릴감, 쾌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액셀을 밟는 발이 절로 움직인다. 기분 짱이다.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그런데…….

 뭐야? 

 시야가 확 트인 400미터 전방에 두 대의 차가 1, 2차선을 가로막고 있다.

 아반떼의 고무줄이 탄성을 잃고 늘어진다.

 에이 씨…….

 남자의 표정이 짜증을 드러낸다. 

 고속주행로를 흰색 마티즈가 뭉개고 있다.

 으이그! 또 여편네군! 빨리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가로막고 있는 거야?

 남자가 여편네의 흰색 마티즈 뒤로 차를 붙인다. 비키라는 신호다. 마티즈가 발발거리며 꼬리를, 깜빡이를 켜며 속도를 높인다. 

 옳지! 그래야지!

 말 잘 듣는 강아지 같다. 먹이라도 있으면 던져 주고 싶다. 

 아! 진짜!

 마티즈는 차선을 바꾸지 못했다. 저속 차선에 있던 벤츠가 마티즈와 동시에 속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마티즈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속셈이다. 

 어라? 뭐야, 저건?

 아반떼가 벤츠 뒤로 차선을 바꾼다. 벤츠는 정지된 것처럼 꿈쩍하지 않는다.

 클랙슨을 누를 수도 없다. 어찌 됐든 벤츠는 저속 차선을 달리고 있으니까. 

 에잇, 씨! 

 아반떼가 차선을 바꿔 다시 마티즈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도리어 마티즈의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 주책없는 브레이크 등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차간을 벌리라는 뜻이다.

 흥! 느려 터진 주제에 할 짓은 다 하네.

 에라, 이 병신 같은 년아! 

 빠앙- 

 아반떼가 강하고 길게 클랙슨을 울려댄다.

 그러자 병신 같은 년이 오른쪽 깜빡이를 켠다. 주눅 든 모습으로. 하지만 속도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저게 미쳤나? 차선을 바꾸는데 왜 속도를 줄여?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빵! 빠앙!

 속도를 줄여 벤츠의 뒤로 가려던 마티즈가 다시 주춤한다.  

 근데 저것들이 왜 저러지?  

 마티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대의 차에 몰려 쩔쩔맨다.

 아반떼가 다시 한번 클랙슨을 울린다. 양보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것은 벤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마티즈에게 절대 앞을 내어 주지 않는다. 잠시 머뭇머뭇 주저하던 마티즈가 어정쩡하게 급발진을 한다. 잠깐 동안 마티즈와 벤츠 사이에 고속버스가 들어갈 만큼의 간격이 벌어진다. 남자가 오른쪽 깜빡이를 켜며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는다. 스피드를 높여 재빠르게 차선을 바꾼 아반떼는 벤츠 앞으로 나서며 동시에 간격을 벌린다. 사이드미러 속의 마티즈가 멀어지고 있다.

 여편네! 집에나 있지 고속도로엔 왜 기어 쳐 나와?

 그러나…….

 저 새끼가?

 벤츠가 들이박을 듯이 다가와 있다.

 남자가 브레이크를 밟는다. 처음엔 짧게, 다음엔 길게 두 번. 하지만 벤츠는 차간을 벌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에이 씨! 액셀!

 가속페달을 밟는다. 붕- 소리와 함께 게이지가 가파르게 오르며 속도가 붙는다. 130……160km. 평일의 중앙고속도로엔 거치적거리는 차가 없다. 

 백미러 속. 여전히 새끼가 따라붙어 있다.

 빌어먹을!

 남자가 갈등한다.

 씨발!

 남자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꾼다.

 벤츠가 아반떼 옆을 지난다, 기보다는 일순간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벤츠가 검은 유리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는 느낌을 받는다.

 씨!

 잠시 정체감의 착시를 일으켰던 벤츠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양 차선을 넘나들어 사라진다. 

 씨발, 좆같은 새끼! 

 그러나 남자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고, 점이 되어 있던 마티즈가 사이드미러 속에서 힘겹게 달려오며 그 여린 모양새를 갖춰 간다.

 남자의 아반떼가 오른쪽 깜빡이를 켜며 휴게소 차선으로 들어선다. 속도를 줄이며 휴게소 입구로 진입하고도 한참 후, 흰색 마티즈가 그곳을 지나쳐 간다. 여전히 굼벵이 같은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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