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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일상 Feb 26. 2024

겨울 방학 일기

일상 19. 우리의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마음이 주춤했다.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추워서 놀이터에 가기도 힘들 텐데 무얼 하며 방학을 지내지?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겨울 방학 동안 무얼 해서 밥을 주지, 아이들끼리 있다가 가스불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방학을 보내야 할 텐데 등등. 긴 공백이 주어지는 시간 앞에서 일단 걱정이 앞섰다.






어릴 때는 추운지 몰랐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나는 유난히 추위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살던 우리 집은 연탄보일러라 방바닥은 뜨끈하지만 위 공기는 차가웠다. 학교에 가면 교실 한가운데 커다란 난로가 있었다. 고작 열 살에서 열세 살이었던 우리는 양동이에 목탄을 날라다가 난로에 넣어 교실 온기를 유지했고, 쉬는 시간이면 난로 근처에 두 손을 내밀어 시린 손을 녹였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일제히 각자 맡은 구역 청소를 했으며, 난로 당번은 다 타고 남은 재를 모아 학교 뒤편 소각장에 갖다 버렸다. 그 시절엔 매서운 추위 탓인지, 하얀 눈밭을 일부러 밟고 다녀서인지, 빨간 장화 안에 털이 있는데도 발가락이 얼어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털장갑을 껴도 구멍 사이로 숭숭 바람이 들었고, 나름 두툼한 모자 달린 빨간 외투는 지금 생각하니 보온성이 없었던 것 같다. 바람은 뼛속까지 들어오고, 볼은 빨갛게 트고, 손발도 꽁꽁 얼었는데 마음은 뭘 모를 때라 그런지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즐거웠다. 오늘은 퇴근 후 장을 봐서 저녁을 해야 한다던가 하는 사소한 걱정이나, 해야 할 일은 계속 쌓이는데 미루면서 자책한다거나, 막상 고심해서 결정해 놓고도 맞는 결정일지 또다시 고민한다던가, 시간을 도둑맞은 느낌이 드는 일은 잘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귀에 잘 들리지 않고 웅얼거리는 소리로 맴돌다가 나가기를 반복했다. 실은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로운 조언을 들어도 내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게 맞는지 아닌지 해보고 부딪친 뒤 스스로 체득하는 것만 그 무게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호기심의 눈으로 세상을 두리번거리던 열 살 꼬마를 지나, 학교 울타리 안에서 최고 학년인 나름 열세 살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시기를 지나고.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매점에 달려가던 열다섯 살을 지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공부와 씨름은 했지만 결과는 남루했던 열아홉 살을 지나고. 낯선 세상과 낯선 이들을 마주한 대학 시절을 지나, 돈의 세계로 입문한 취업 시장을 거쳐서, 어쩌면 이것이 내 인생의 해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결혼을 하고, 해방인 줄 알았으나 감옥이었고, 감옥인 줄 알았으나 어른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나는 지금 어른이와 어른 중간쯤에 서있다. 나도 모르는 허들을 몇 번이나 넘은 걸까. 앞으로 얼마나 크고 작은 허들을 더 넘어야 할까.






추위 앞에 주춤해서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날씨가 조금씩 누그러지자 기지개를 켜고 싶어졌다. 봄을 마중 나온 비 덕분이다. 양팔을 펴서 머리 위로 쭉 올린 뒤, 고개도 뒤로 젖히고, 허리도 꼿꼿이 펴고, 발뒤꿈치도 종아리 근육이 땅기게 올렸다 내렸다 해본다.



두 달의 겨울방학이 지나가고 있다. 아이들이 크면서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몸은 편해졌지만 오히려 신경은 곤두세우고 지내야 했다. 학업도, 진로도, 생활습관도 기본은 지켜야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연령도 성별도 성향도 각기 달라 시기에 맞는 양육을 하기 어려웠다. 한 바구니 육아처럼 같이 키우는 게 나도 살고 아이들도 사는 길이었다.


방학 동안에도 남편과 나는 당연히 일터에 나갔고, 아이들은 집에서 게으름과 핸드폰 하기, 설거지 당번과 밥 차려 먹기, 빨래,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학원 가기, 알바, 그리고 저녁이면 찾아오는 엄마 아빠의 잔소리 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의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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