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옆나라 이상으로 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곳
나는 스스로를 십덕(5+5타쿠)이라 일컬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다. 일본만화인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를 기점으로 소년 만화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던 2010년대, 나는 당시 대한민국 고등학생이었다. 사실은 원조격인 드래곤볼을 이미 만화로 훑어보기는 했으나 아주 심취했던 정도는 아니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당시에도 우연히 TV에 방영되곤 하는 애니메이션을 잠깐잠깐씩 봤을 뿐 지금처럼 푹 빠져있지 않았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푹 빠지게 된 것은 군대에서부터였다.
숱한 어려움들을 헤쳐나가야 했던 신임하사 시절을 포함해 경력을 쌓아나가도 결코 자유와는 근접하지 못했던 나의 4년 간의 군생활 동안, 일본의 소년 만화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나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진정한 자유의 생김새가 어떤 것인지 잊지 않게 했다. 힘들고 고된 순간마다, 루피(원피스의 주인공)의 굴하지 않는 항해를 보면서, 나루토(나루토의 주인공)가 가진 정열적인 불의 의지를 가슴으로 느끼며, 인생에 열정을 다 바치는 삶을 지향하겠노라고 늘 다짐할 수 있었다. 때로는 진심을 다해 눈물을 흘렸고, 때로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들과의 동고동락을 이어왔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는 한 편의 소년 만화 속에 살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일본은 나에게 고마운 나라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의 힘든 시기를 이겨낼 힘을 나에게 준 셈이니 말이다. 인생은 당장에 닥쳐 있는 시련들만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돌파해 나가며 성장해 나가는 하나의 서사임을, 나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다음으로 내가 빠졌던 것은 일본의 잔잔하고도 가슴 시린 로맨스 영화들이었다.
어린 시절 보고 자란 한국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는 어딘가 지나치게 여성향으로 발달해 신데렐라 스토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랑이란 남자가 여성에게 미치도록 헌신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하고 있었다. 사랑에 헤매기 시작했던 20대 초반에 들어서도 그런 생각이 이어졌었다. 여성은 사랑받는 대상으로 한정하고, 그들에 맞춰 배려해 주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름다운 사랑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의 드라마나 영화는 정확히 반대편에 서서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듯한 서사들이 참 많았다. <내 첫사랑을 너에게 바친다>라든가,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든가. 한국인 남성들이 일본 여성들의 이미지를 헌신적이라고 생각하게 한 데에 큰 공헌을 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외에도 굳이 그런 식의 서사가 아니더라도, 특유의 잔잔하게 가슴을 사무치게 울리는 일본 영화들을 사랑해 왔다.
여러 일본 영화들을 즐겨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일본의 배우들이 생겨났고, 그 배우들이 출연하는 드라마에도 눈길을 돌리게 됐다.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나는 일본 문화에 스며들었고, 일본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나는 생각했다.
"일본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당연히 살아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 눌러앉아 살고 싶다는 생각은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에 비해 싫은 것도 아니었다. 오직 일본 문화를 온전히 느껴보기 위해서,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매력을 느낀 것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은은하면서도 소박하게 꾸며진 일본 시골들의 풍경에 한껏 매료된 것도 있었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찾아내는 기쁨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고, 시간이 지나 돌이켜 봐도 그때 그 생각이 어느 정도는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 가서 살아본 선택은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참 잘한 선택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제2외국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를 꽤 즐겁게 공부해 와서 언어는 배우면 금방 익힐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회화였기 때문에, 많은 미디어들을 접했던 나에게는 꽤 유리한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역을 반년 정도 앞둔 시점부터, 자전거를 틈틈이 타는 와중에 일본어 공부도 꾸준히 지속해 나갔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드라마를 볼 때에도 최대한 자막을 배제한 상태로 눈과 귀로 담으려 노력했다. 배우면 배울수록 일본어의 발음이나 억양들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국어의 딱딱하고 때로는 뚝- 하고 끊기는 특성에 비해, 받침이 없는 일본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운 느낌을 주곤 했다. 뭐든지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재미를 찾는 나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준비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나는 자전거 일주를 마친 뒤 일본 워킹홀리데이 비자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게 비자를 얻어낼 수 있었다. 전역한 지 4달이 된 나는, 그렇게 물 흐르듯 일본 땅을 무사히 밟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