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중국, 베트남 친구는 있어, 아주 많이.
낯선 땅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갖는 희망 가운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현지인 친구에 대한 기대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워킹 홀리데이에 나서는 사람들이라면 그 부분에 있어 더더욱 설렘을 더할 것이 분명하다. 그 설렘과 기대는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방대하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는 어쩐지 눈에 띄게 줄어들어버리니 말이다. 젊은 날의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일본 땅에 발을 디디며 그런 막연하고 거대한 기대를 품었다. 아니,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일본의 언어나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상태였고, 그로 인해 일본에서 살기로 마음먹고 고국을 뒤로한 채 떠나 온 것이니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의 모국어가 아닌 상대방의 모국어로 소통하고 감정적인 교류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참 멋진 일이지 않은가? 일본인 친구에 대한 기대감에 더해 어쩌면 귀엽고 깜찍한 일본의 연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당히 부푼 감정을 안고 오사카 생활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정말 녹록지가 않았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내가 외국인으로서 어학교에 몸을 담고 있어야만 했었던 환경이 두 번째 이유였다. 일본인과의 교류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았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과 교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양각색의 나라에서 건너온 친구들이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 나가서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내가 맡은 설거지라는 업무의 특성상 일본인들보다는 중국이나 태국, 혹은 베트남 사람과 함께 일하는 날이 잦았다. 애초에 일 자체도 그리 여유 있는 편이 아니어서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접시를 주고받으며 있는 힘껏 닦아내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어쩌다 같이 일하게 되는 일본인들은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나를 가엾게 여기는 어머니, 아버지 뻘의 일본인 아줌마, 아저씨들이었다. 물론,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었지만, 어쩐지 암울해지는 마음을 달래기엔 한참은 부족했었다. 가끔 마주했던 젊은 또래의 일본인 직원들 역시 나와는 벽을 쌓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었다. '다나카'와 같이 외국인 노동자 부리듯이 부리는 사람도 있었고.
일본인 친구를 만들어 보겠다는 당찬 계획으로부터는 다소 멀어졌지만, 어쨌거나 나는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내가 다녔던 어학교 학급 내에서 중국, 베트남, 러시아 친구들과 함께 꽤 괜찮은 추억들도 쌓아나갔다. 그래, 일본인이 아니면 어때? 그들도 한국에서는 좀처럼 사귀기 힘든 외국인 친구들이라는 점에서는 일본인 친구와 다를 게 없었다. 한국에서 쌓을 수 없는 경험들을 쌓아나가면, 그것 또한 색다른 재미를 주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20명이 조금 되지 않는 학급에는 중국인들이 열 명 정도, 베트남과 태국 친구들이 두셋, 나머지 네다섯이 나를 포함한 한국인, 그리고 유일한 러시아인인 내 짝꿍 '이고리'가 있었다. 먼저 이고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전 세계 여자들을 다 만나볼 거야. 나이지리아 여자이든, 몽골여자이든 가리지 않아."
어느 어슴푸레한 저녁, 도톤보리 강을 바라보며 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이고리가 내뱉었던 당찬 포부의 말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맴돈다. 우리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면, 어학교에서의 수업이 끝난 뒤 도톤보리 강을 따라서 걸어 드문드문 있는 벤치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고 앉아서 한참이고 맥주를 들이켜곤 했었다. 하루는 내가 사고, 하루는 이고리가 사고, 또 어느 날은 야끼토리(일본식 닭고기 꼬치 요리) 집에 가서 그가 좋아하는 ZIMA라는 미국 칵테일을 함께 마시기도 했다. 당시에는 무슨 재밌는 이야기들을 그렇게 밤이 새도록 나눴던 걸까. 그와 함께 마시면서 웃고 떠들었던 기억은 있지만, 좀처럼 어떤 주제의 이야기들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대거나, ZIMA는 훌륭한 술이라며 홀짝홀짝 들이켜던 모습들만이 간간이 머릿속에 떠갈 뿐이다.
하루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 선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코가 비뚤어지도록 한번 마셔보자고 녀석이 제안해 온 적이 있었다. 나름 술로는 자부심이 있었던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그 선술집의 주인(일본인이었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상당히 흥미를 보이며 자신의 한국 여행담을 나에게 들려주었던 것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슈에 대해 물어왔던 것 정도이다. 이고리와의 대화는 당시 우리 둘의 모습이 담긴 셀카 사진을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당시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우리나라가 몸살을 앓던 때였다. 나도 그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쭉 일본에만 머물러 있었던 터라, 주인장의 질문들에 어리숙한 일본어로 대강 대답했었던 게 기억에 남아있다. 아무튼, 그날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생맥주를 연거푸 들이부었다. 정확히 얼마나 마셨는지까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고리가 많이 취한 탓에 그의 스마트폰으로 친누나를 불렀고 잠시 뒤 선술집에 모습을 드러낸 누나에게 이고리를 부탁한다며 인계를 깔끔하게 마쳤던 것은 기억이 난다. 누나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이고리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었다. "내일 학교 나와야 돼!" 그의 뒷모습은 알겠다고 소리쳤지만, 결국 다음날 이고리는 감기에 걸려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러시아인과 한국인의 대결에서 한국인이 이겼습니다, 여러분!"
러시아 하면 보드카, 한국 하면 소주. 술로는 웬만해서 지지 않는 두 나라의 대결에서 한국인이 승리를 거두었다며 힘찬 발성으로 아침 조회를 시작했었던 학급 선생님의 상기된 얼굴이 기억난다. 감기로 결석한 이고리가 약간은 걱정되긴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으쓱해진 어깨를 좀처럼 누르지는 못했었다. 이고리는 그 뒤로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를 다니다가 한 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가기 직전 군대 문제로 인해 귀국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긴 했었는데, 지금 전쟁에 끌려가지는 않았으려나, 조금은 염려스럽다. 연락은 이미 오래전에 끊겨버렸지만, 부디 그가 강녕하길 빈다.
그다음으로는 학급 내에 가장 많았던 중국인 친구들, 그중에서도 나보다 네 살 연상인 누나 '아테키'가 특히 기억에 남아있다. 중국인들은 언어적으로 그 중국어의 발음이 어려워 다들 일본어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아테키 역시 그녀의 일본식 이름이었다. 그녀가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여전히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에서도 그렇지만, 그런 것보다는 우리 학급 내에서 가장 예쁘고 똑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어가 그토록 우아하고 청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중국어를 통해 처음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원초적인 감정을 토대로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학교에 수업이 없는 날에는 카페에서 공부를 한다는 그녀 옆에 달라붙어 함께 공부를 한다거나,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는 그녀에게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현실적인 여건이나 여러 사정들에 의해 깊은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힘든 생활 중에도 큰 힘을 주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힘들 때일수록 사람들은 한 줄기 낭만이나 사랑과 같은 정열적인 것들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하나의 낭만이자 열정이었던 그녀에게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이 남아있다.
아테키 외에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상당히 부잣집 자제였던 한 중국인 친구(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덕분에 중국인들이 모이는 파티에 초대받기도 했었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여러 베트남, 태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웃고 떠들면서 즐기기도 했었다. 일본인과 일본어로 소통하는 즐거움도 물론 크겠지만, 일본인이 아닌 친구들과 일본어로 소통하는 재미는 생각 외로 신선하면서 흥미로운 감정을 느끼게 했다. 서로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교류한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 해외에 나온 만큼 한국인들과는 최대한 교류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터라, 당시의 한국인 친구들과는 깊은 이야기들까진 애써 나누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과는 같은 나라의 국민으로서 소소하게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 있었다.
당초 일본인 친구가 목적이었지만, 당시 나와 시간을 함께했던 그들을 대체품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모두 멀어져 버려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고 지내지는 못하지만, 나에게는 모두 소중한 인연들이었음에는 변함이 없다. 고되고 힘들었던 초기 오사카 적응기에 나에게는 몇 없는 기쁨을 안겨준 존재들이었으니, 그저 고마울 수밖에. 지금은 이름도 잊히고, 당시에 나누었던 소소한 대화들도 어딘가로 흩어져 버렸지만, 그들에 대한 감정만큼은 무한한 감사로 여전히 내 가슴속에 반짝이고 있다. 다들 세계 각지에서 자신만의 인생을 당당히 살아나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