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쉽지 않았던 외국인 노동자의 삶
편견은 일상생활 속에서 선택의 순간들 중에 반복되는 것들에 대해 당위성을 심어주어, 보다 원하는 대상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도와준다. 많은 사람들이 편견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편견이 없다면 인생의 모든 것들에 대해 매 순간 사고하고 성찰할 성격이기 때문에, 늘 이런 편견에 감사하면서 사는 편이다. 하지만, 편견의 부정적인 면을 아예 무시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 생활 중에 나를 철저히 무너뜨렸었던 이 하나의 편견은, 나의 인생 중에 몇 안 되는 부정적인 쪽에 속하는 편견이었다.
일본에 발을 들인 지 10일 만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는 기쁨에 젖어, 나는 일순간 '워킹'을 하러 온 노동자의 본분을 잊은 채, '홀리데이'를 즐기려 하는 관광객이 되고야 말았다. 오사카 쇼핑의 명소라고 할 수 있는 신사이바시와 오렌지스트리트에서 가방과 신발, 그리고 피규어까지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이제 일자리를 구했으니 일만 성실히 해나가면 월급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아주 오만한 생각에서 비롯된 과소비였다. 당시 일본의 시급은 오사카 기준으로 900엔에서 1,000엔 사이, 그러니까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9,000원에서 10,000원 가까이 되는 액수였다. 당시 한국의 시급이 6,000원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괜찮은 액수였다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그 정도로 헤프게 살아도 괜찮은 수준까지는 전혀 아니었음에도, 기쁜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이해할 만한 이유를 찾는다고 하면, 태어나 처음으로 해외에 나와 일자리를 구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한동안 제대로 즐기지 못했었던 관광에 대해 보상심리가 발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그 선택은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된 최악의 한 수였다.
"급여? 그거 다음 달 25일에 들어오잖아."
일을 시작한 지 2주 정도가 지났을 때, 같이 아라이바(설거지 칸)에서 일하던 일본인 아저씨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평소처럼 접시를 닦아내다가 잠시 한가한 시간에 궁금한 게 있으면 아무것이나 물어보라는 아저씨의 말에, 문득 급여가 언제 들어오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마도 일을 나온 첫째 날이나 혹은 아르바이트 면접 당일에 누군가가 이야기해 주었으나, 당연히 우리나라와 같이 다음 달 10일에 들어오는 것이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왼쪽 귀로 들어온 이야기를 오른쪽으로 그대로 흘려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장장 4년의 군생활 동안 정확히 매달 10일에 급여를 받았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히 박히어 있어, 그 이외의 날짜에 대한 고려를 조금도 하지 않은 나의 무의식이 원인일지도 몰랐다. 그 하나의 편견으로 인해 나의 삶은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나의 통장은 10일에 아르바이트 급여로 채워질 것이라는 계획 하에 아낌없이 비워지고 있었지만, 나는 당초 계획보다 약 15일을 더 버텨내야만 했다. 말 그대로 정말 큰일이 나버린 것이다. 당장에 먹을거리 걱정부터 해나가야 했다. 수중에는 그리 많은 돈이 쥐어져있지 않았다. 접시를 계속해서 닦아내면서도 어지러운 머릿속이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 나는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급여일까지 남은 날은 약 25일, 남은 돈은 15,000엔 정도였다. 하루에 600엔 정도만을 빠듯하게 사용해야 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루에 6천 원으로만 살아가라는 이야기인데...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아침이나 점심을 샌드위치나 빵으로 버티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은 손님들이 먹다 남긴 잔반을 몰래 입으로 집어넣는 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면 된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에는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면 아주 아슬아슬하게 600엔 정도의 예산으로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다. 대형 잡화상점인 '돈키호테'에 우리나라의 신라면이 5개 묶음으로 400엔 정도의 가격으로 진열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나에게 엄청난 축복이었다. 나의 눈물겨운 고난의 행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계획한 대로 25일 정도는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지만, 어학교 기숙사 계약은 3개월이었기에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기 위해 필요한 집세를 모아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여유롭지 못한 생활은 계획보다 더 길게 이어졌다. 아침, 점심을 빵과 샌드위치로 때우고 저녁에는 라면을 먹는 것이 나의 기본 식단이었지만, 가끔 예기치 못한 지출로 인해 예산이 부족해지면, 아침과 점심 중 한 끼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 반 정도가 지나니 몸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안 그래도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군대를 전역한 이후에도 형에게 해골이라며 놀림을 받곤 했었는데, 어째 일본에 와서 더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분명, 이런 걸 기대하고 워킹 홀리데이를 온 것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일본 생활을 한 달 반 정도 이어가던 중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던 때가 있었다. 장례식장 한편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어머니는 나를 보며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셨는데, 할머니 돌아가신 것보다 뼈밖에 남지 않은 내 모습에 더 슬퍼서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제대로 먹고 다니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내 상태에 대해서 심각하다고 인지하지는 못했었다. 왠지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며 실없는 소리로 어머니에게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넸던 기억이 난다. 말이 끝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았다. 뼈밖에 없는 아들을 때리다니.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모부가 외국에서 고생이 많다며 용돈을 챙겨주었다. 나름대로 살림살이에 잘 활용하며 덕분에 굶는 날을 줄일 수가 있었다. 3일 정도 한국에서 제대로 배를 불린 뒤, 나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난과 배고픔 같은 원초적인 고난을 제외하고도 일본 생활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요인은 몇 가지가 더 있었다. 룸메이트와의 불화가 그중 하나였다. 사소한 오해와 말다툼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더 이상 붙어 지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서로가 동의하고 어학교에 부탁해 방을 옮겨줄 것을 건의하는 사태까지 번졌었다. 사실,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까지 했는지 현재로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배고픔과 가난에 허덕이던 내가 어떤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으로 인해 그 친구에게 울분을 토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꽤 허영심이 많은 친구이긴 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할 정도로 과감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극한의 상황은 언제나 사람의 다른 면을 드러나게 한다. 당시의 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던 것이겠지. 그렇게 옮겨간 다른 숙소에서는 청소를 전혀 하지 않는 룸메이트와 방을 써야 했다. 똥을 피해서 간 곳에서 설사를 마주한 느낌이 딱 그것과 같을 것이다. 나는 지난 룸메이트와의 불화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내가 짊어지겠다는, 한 사람의 고행자가 된 마음으로 그 쓰레기장과도 같은 방을 혼자서 주섬주섬 치워나갔다. 어느 정도 깔끔해진 방을 토대로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내 구역의 청결만큼은 철저히 지켜낼 수 있었다. 당시의 광경은 마치 남과 북이 서로 통일될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와도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복병은, 인생의 거의 모든 순간에서 그렇듯 일터에서 찾아온 것이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과 다른 나라의 외국인 동료들은 친절했지만, 항상 어느 무리든 그렇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다나카(본명인지 일자리에서 쓰는 가명인지는 모른다)'라는 이름의 20대 일본 여성이 그랬다. 개그맨 김경욱 님의 그 '다나카'가 모습을 드러내기 한참 전이었던 당시, 나에게 그 이름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신쿤-!"
(나의 이름이 일본인들에게는 발음하기에 어려운 것이어서, 누군가 이름을 물어오면 이름의 성인 '신'씨로 소개를 하고 다녔다)
일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시점부터, 그녀의 찢어질 듯한 괴성은 접시를 닦던 나의 고막을 괴롭고도 지겹게 두드렸다. 아주 약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날카로운 눈빛을 장착하고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일삼으면 짜증 섞인 말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가게는 총 네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매일 쉬프트에 따라 근무하는 층을 달리했었다. 출근하여 당일 근무 쉬프트를 확인한 뒤에 나는 근무하는 층에 올라가 가장 먼저 다나카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폈다. 하루를 함께 일할 직원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도중에 다나카의 얼굴을 마주하는 날에는 속으로 엄청난 좌절을 삭혀야만 했다. 오늘은 고막이 찢어지는 날이구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고막아.
일본에 가기 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머릿속으로 정성스레 그려 두었던 일본 여성에 대한 나의 이상을 그녀는 철저히 깨부수어 주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만났던 남성 지인들은 일본에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왔다고 하면 일본 여자에 대해 곧잘 물어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거기도 다 똑같아요. 착한 여자들은 착한데, 나쁜 여자들은 나빠. 그 뻔하디 뻔한 답을 입에 올릴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기분 나쁘게 고막을 찢는듯한 다나카의 음성이 울려 퍼지곤 했다. 신쿤-!
그녀가 소리를 치는 대부분의 이유는 나의 언어적인 이해력 문제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일본에 온 지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부터 그런 일들을 겪으니 왠지 서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업무적으로 잘 해내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외국인에 대한 사소한 배려조차 없이 자신의 업무를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그녀의 일방적인 과욕은 선량한(?) 외국인 노동자였던 나를 아프게 짓밟았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심정이 절절히 이해가 갔다. 일찍이 공단으로 둘러싸인 시흥이라는 동네에서 자라면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길거리나 마트에서 마주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어린 나는, 막상 타국에 나와 외국인 노동자가 된 뒤에야 그들의 슬픔과 설움이 어떤 것인지 머리와 가슴 모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무관심했던 나의 지난날들을 가슴깊이 반성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심정들을 겪어나가며 우리나라 땅에 당당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겠지. 그런 생각들이 스치며 그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까지 샘솟았다. 세상은 겪은 만큼 보인다는 말은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진정 아파 본 자만이 남의 고통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나약함에 대해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없는지 돌아봐야 마땅한 것이다.
이런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설움을 일본에서 겪어나가면서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사무치게 그리워졌었다. 그저 우리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국민으로 살아 숨 쉬는 것 자체도 엄청나게 큰 행복이었구나. 언제나 나를 지지해 주던 가족들도 보고 싶었고,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게 밤새 놀았던 그 시절도 너무나 그리웠다. 쉽지 않을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최악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해외에 나가본 적도 없었던 나였으니, 외국인의 신분으로 받는 차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스스로에게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 행위였다. 새로운 어려움들에 부딪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나아갈 수만 있다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 하나라도 찾아낸다면 그런 지옥과도 같은 생활을 어떻게든 견뎌낼 수가 있다. 나에게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를 웃을 수 있게 한 어학교 친구들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