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시작된 방황, 그리고 찾아낸 해답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일본에서 귀국을 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워킹홀리데이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얻었다는 판단 하에 5개월간의 짧은 일본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뿐이었으니, 한국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새롭게 또 다른 인생이, 막대한 고심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민도 고민이었지만, 해외 생활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라 귀국 직후에는 약간의 휴식을 가지면서 그간 만나지 못했던 이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짧다고는 해도 5개월 간의 해외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꽤나 있어 일이 주 정도의 시간은 그렇게 인생의 고민들로부터 잠시나마 온전히 멀어져 있을 수 있었다.
잠깐의 휴식을 마친 뒤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카페 아르바이트였다. 여전히 생계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가운데 1순위였기에 어떤 일이든 업종을 막론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먼저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었는지, 한국에서라도 못다한 꿈(?)을 이뤄야겠다는 나름의 보상 심리가 생각보다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아르바이트 모집 사이트에 구인 공고가 떠있는 동네 카페에 닥치는 대로 무작정 연락을 취했고, 두 곳 정도에서 면접을 본 뒤 다행히 그 가운데 한 곳으로부터 합격 연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군대 시절 잠깐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를 떠올려냈고, 곧바로 피아노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피아노 학원으로 쳐들어갔다. 거주 중인 아파트에서 사거리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면 있는, 작은 아파트 단지의 상가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학원이었다. 차마 청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낡은 피아노로부터의 둔탁하고도 단순한 선율이 은근히 새어 나오는 학원의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저, 피아노 배우고 싶은데요"
작은 피아노 방이 세 개 정도가 있었는데, 각각의 방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꼬맹이들이 꼼지락거리던 연주를 멈추고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보고는 킥킥 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 아저씬데 니들이랑 피아노 같이 치러 왔다, 어쩔래. 50대 정도로 보이는 어머니뻘 원장님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한 달 수업료와 교재에 대해서 술술 설명하기 시작했다. 버튼을 눌러 작동시키는 자동응답기 로봇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곧바로 등록을 마치고 다음날부터 나는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 딱히 구체적으로 미래가 그려지지는 않지만, 당장 입에 풀칠을 하고 적당히 흥미를 충족해 나간다는 점에서 나름의 궁여지책 정도는 갖춘 셈이었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에는 카페 저녁 마감 알바를 했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피아노 레슨을 곁들인 나날들이 한 달 가량 이어졌다. 딱히 앞날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뜨뜻미지근한 일상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마땅히 떠오르는 대안도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저 이 정도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묵묵히 채워갈 뿐이었다. 언젠가는 꽤 괜찮은 생각이 막연히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그 괜찮은 생각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른 시기에 찾아왔다.
별 탈 없는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져가던 어느 나른한 주말 오후, 베란다 한편에 외롭게 세워져 있는 스케이트 보드가 내 눈에 들어왔다. 당시로부터 1년 정도 전에 반짝- 하고 스케이트보드가 유행했더랬다. 친형이 그런 유행에 탑승하여 줄기차게 타고 다니다가 언제부터인가 흥미를 잃어 베란다에 버리듯이 내팽개친 모양새였다. 나는 애초에 타는 법도 몰랐고, 딱히 거기에 열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그 애처로운 모습을 외면하기가 힘들어 그 녀석을 집어 들게 되었다고. 그렇게 근처 초등학교 우레탄 농구장에서 달려볼 심산으로 스케이트 보드를 질질 끌면서 걸어갔고, 마침내 도착한 연습장소에서 보드에 올라타 이리저리 균형을 잡아보려 애를 쓰다 얼마 못 가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고. 그렇게 세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넘어지면서 오른손을 먼저 짚는 치명적인 실수를 해버린 탓에 넘어지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저질 운동 신경은 이따금 그런 식으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곤 한다. 퉁퉁 부어오른 오른손을 부여잡고 얼마 타보지도 못한 보드를 질질 끌며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손의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행히 주말에도 열려있던 정형외과가 근처에 있어서 급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진단 결과는, 일주일간의 반깁스. 나는 철저한 오른손잡이였기에, 나의 모든 일상생활을 일주일간 강제 중단하라는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카페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그 비보를 알렸고, 일주일 뒤에 출근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피아노 학원에도 전화를 해서 원장님에게 일주일간은 레슨을 받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그렇게 나는 반깁스 한 오른손과 함께할 일주일을 급하게 계획해야만 했다. 손을 사용하지 못하니, 몇 안 되는 할 수 있는 것들은 금세 머릿속에서 추려졌다. 이참에 잠시 놓고 지냈던 책을 읽어야겠다는 판단이 섰고, 나는 곧바로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군대에 머물던 시절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감명 깊게 읽었던 덕분에, 나에게는 어느 서점이나 도서관을 가든 하루키 코너를 먼저 가서 둘러보는 습관이 생겼다. 평소처럼 책들을 둘러보던 중, 못 보던 하루키의 자서전(정확히는 자전적 에세이)이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유혹을 참아낸다면, 인생을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가 없지. 나는 본능에 이끌려 그 책을 꺼내어 대출을 받아 집으로 가져왔다. 소설만 잘 쓰는 줄 알았던 하루키는 정갈한 글솜씨로 본인만의 색깔을 담아 에세이 역시도 맛깔나게 잘 풀어내는 듯했다. 하긴, 하루키에게 다소 복잡할 수 있는 문학적 표현들과 감성을 써 내려가야 하는 소설에 비한다면, 평소 일상을 다루는 에세이는 보다 쉽게 써 내려갈 수 있으니 식은 죽 먹기일지도 모른다. 기실, 하루키의 책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 건드리고 싶었던 작가로서의 꿈을 어루만져 보겠다는 심산으로 그 책의 제목에 끌려 집어든 것이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하루키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소설가로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도 컸다.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는 고마운 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에서 소개된, 하루키가 소설을 처음 집필하게 된 계기에 관한 일화는 나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주는 것이었다.
우연히 야구 경기를 보러 가서 당시 무명이었던 타자가 2루타를 쳐내는 것을 직관하며 문득 자신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는 구절을 보고서, 나는 나의 오랜 꿈을 다시 꺼내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에 자신을 건드려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그 애처로운 꿈이라는 녀석을, 나는 마침내 들여다보았다. 나도,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책장을 넘겨가며 구구절절 공감을 더해갔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대작가가 말하는 소설가란 어떤 것이며, 자신이 쓰는 소설이 어떤 식으로 써지는 것이며 하는 문장들에 잔뜩 심취한 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덮은 순간, 나는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무조건적으로 하루키의 삶을 따라가야겠다는 철없는 생각에서 비롯된 다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다짐 역시도 남들보다는 늦은 나이에라도 대학교 졸업장을 따내 작가 프로필에 한 줄이라도 더 써넣겠다는 다소 얄팍한 생각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긴 하다. 대학에 가지 않고 그대로 흘러간다면 나의 경우에는 고등학교 졸업 정도밖에 새길 수가 없다 보니, 어딘가 모양새가 빠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소설가인 나의 이력에 뜬금없이 해병대 중사 전역이라는 해괴한 한 줄을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을지도). 꽤 괜찮은 대학교 졸업 이력 하나 새겨 넣는 게 작가로서 폼이 날 것 같다는 아주 얕은 생각이었다. 거창한 이유도 필요 없이 딱, 그 정도의 이유만으로도 내가 당장 해나가야 할 목표들이 명확해지는 듯했다. 당시 내 나이 스물넷, 2017년 3월의 중순이었고 어느덧 여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때였다. 내 다음 목표는 대학이었다. 그 말인 즉, 내가 경험했었던 수능으로부터 6년이 흐른 시점에서 수능에 다시 응시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