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정착한 지 반년만에 다시 귀국을 꿈꾸다
교토에서의 행복한 나날들은 이어졌지만 일자리는 좀처럼 구해지지가 않았다. 어느 정도 일본어 회화에는 자신감이 붙어있었던 때라 카페 같은 식음료 가게에서 서빙을 하는 일을 희망했지만, 좀처럼 외국인에게 그런 직무를 맡기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몇 차례의 면접 실패 끝에 깨달아 갔다. 그러는 동안, 생활비를 구해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한 용역 업체에 나가 일용직 일을 몇 차례 나가기도 했었다. 특별히 힘들었다거나 특이하지는 않아서 기억에 크게 남아 있지는 않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백수 시절이 한 달 정도 흘러갈 동안, 나는 일본어로 된 라이트 노벨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독해 능력이 향상되었고, 매일을 일본인 형누나들과 붙어 지내다 보니 회화 실력도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아주 어려운 한자어가 아니고서는 대화의 대부분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티브이에 나오는 뉴스들도 80퍼센트 이상은 해석이 가능했다. 말하기 능력 역시 바로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원어민들 덕분에 잘못된 발음이나 단어의 오용 등이 즉각적으로 교정되곤 했다. 아주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원어민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회화 실력을, 어느새 나는 갖추게 되었다.
회화적인 문제는 스스로 없다고 판단이 되었지만, 원하는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아서 일용직 일을 가끔씩 해나가며 시간을 축낼 뿐인 워킹홀리데이라니. 어쩐지 처음 일본에 발을 디딜 때와는 달리 뜨뜻미지근해진 느낌이었다. 하루의 낙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 즐거움과 퇴근하고 돌아온 형누나들과의 담소, 그리고 가끔 한가할 때면 나서곤 했던 동네 산책 정도였다. 내가 일본에서만 특별히 할 수 있는 경험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이미 다 해 본 게 아닐까. 어쩐지 그런 생각들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전거로 일본 열도를 일주하는 여행을 잠시 동안 꿈꿨었지만, 그 여행은 굳이 워킹 홀리데이가 아니어도 여유가 될 때 다시 일본으로 와도 충분히 해나갈 수 있는 일임이 분명했다. 일본에서 일하는 것 자체는 아르바이트 시급 자체는 우리나라에 비해 높긴 했으나 변칙적인 시간대로 일해야 하는 곳들이 많아서 내가 하고자 하는 서빙 아르바이트 같은 일은 여러 개의 일들을 해나가지 않는 이상 안정적인 금액을 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루에 3~4일을 3~4시간씩 적은 시간 동안 일하는 급여로는 집세를 내고 생활비를 내면 절반도 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해나가며 매일매일 노동에 찌들어 사는 삶은 어쩐지 보람보다는 허무감으로 가득 찰 것만 같은 느낌에 상당히 꺼려졌다. 그것은 말 그대로 워킹 홀리데이라기보다는 워킹데이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일본에서 그런 일상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완전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위해 일본까지 건너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서빙 아르바이트 역시도, 많은 일본인들과 더 가깝게 소통하고 친해지기 위한 목적일 뿐 큰 의미를 가지고 원했던 일은 아니었다. 셰어하우스에서 지내는 동안 친한 일본인 형누나들과 관계를 가꾸어 나갈 수 있었으니, 어느 정도 그런 목적은 충족한 셈이긴 했다. 게다가 이미 내가 충분한 회화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여행을 통해서도 일본 현지인 친구들을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렇게 더 이상 일본에 머물러야 할 이유들보다는 떠나야 하는 이유들을 더 많이 헤아리기 시작했다.
"글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따라가다 보니 이렇게 됐어."
내가 이런 질문들에 헤매고 있을 때, 원초적인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 어차피 워킹 홀리데이이든 그 안에서 만들어가는 단기적인 목적이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모두 집어넣어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나는 함께 지내는 형 누나들에게 어떻게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와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명 모두, 그저 원하는 대로 살아왔고 엄청난 노력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열심히 살아온 덕분에 지금의 직장과 인생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비슷하게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는 여유로운 답변을 내어놓았다. 내가 처음부터 그들을 멋있게 봤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남들이 봤을 때는 다소 평범해 보일지도 모를 교사나 간호사, 그리고 일반 사무직과 같은 직장도,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쟁취해 낸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또 그것에 만족한다고 이야기했다. 어쩐지 평범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는 듯했다. 당시, 내 나이는 갓 스물넷이 된 상태였고 주변 친구들은 여전히 초중고부터 이어진 대학이라는 집단에 속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은 뒤로 미뤄두고 당장에 닥친 학점이나 취업 준비에만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저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가고, 학점에 맞게 괜찮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흥미나 적성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 세태가 팽배했었다. 훗날, 뒤늦게 직장을 3~4년 정도 다니다가 문득 자신의 인생에서 방황하는 친구들을 마주치는 일은 생각보다 흔했다. 형누나들의 답변을 들이며 잠시 일본 생활에 잠식당해 잊고 있었던 사실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원해서 온 것인데, 더 이상 일본에서의 생활에서 원하는 것이 없다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 듯했다. 내가 일본 워킹 홀리데이에서 원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히 일본 현지인 친구와의 문화적인 교류였다. 대학을 간다거나, 일본에서 직장을 얻겠다는 다소 거창한 목표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것이었으며, 셰어 하우스에 지내는 동안 어느 정도 내 목적은 이루었고, 또 충분한 회화실력을 길러냈기 때문에 훗날 여행으로도 이뤄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이제 나에게는 없었다. 그런 이유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1년이라는 워킹 홀리데이 기간을 채우고 싶은 마음에 그런 사실들을 애써 외면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선 한국으로 돌아가 원하는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접어두었던 음악에 관한 생각이나, 혹은 글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원하는 직장에 대한 고민들도 곁들여 앞으로의 인생을 새롭게 그려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굳이 일본 땅에서 붙잡고 늘어진다 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고민들이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다 얻었고, 나머지는 한국으로 돌아가 직접 부딪쳐 나가면서 깨달아야 할 것들이 분명했다. 나는 결심이 서자마자, 몇 주 뒤에 있는 귀국 편 항공권을 예매했고, 남은 기간 동안은 철저히 관광과 여유들로 채워갔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고민들은 잠시 내려놓은 채 어쩌면 당분간은 찾지 않게 될 간사이 지방을,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