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어른들과의 만남
다행히 교토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은 모두가 멋진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인 '오리' 형과 그의 여자친구였던 '아야카' 누나, 그리고 한국을 사랑했던 '유키노' 누나, 교사로 일하고 있던 '케이타' 형. 지금은 아예 연락이 끊겨버렸거나, 할 수 있지만 어쩐지 어색하게 멀어진 상태라 연락을 안 한지 오랜 세월이 지나버렸지만, 여전히 그들과 함께한 좋은 추억들을 곱씹으며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아라시야마라는 마을 자체도 내가 그토록 바랐단 일본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어서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각양각색으로 멋진 인생을 살아내던 그들의 모습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일석이조를 넘어 일석삼조, 사조라고 표현해도 모자랄 정도로 교토에서의 생활은 정말이지 분에 넘치는 삶이었다.
내가 처음 집으로 들어간 첫날에는 이른 낮시간대여서 집을 바깥에서 둘러보았을 때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해 보였다. 미리 받아둔 현관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역시 바깥에서 본 것과 다름없이 조용함이 가득 들어차 있는 분위기였고 유일하게 집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소리를 내는 것은 오직 나 혼자였다. 밖은 환한 대낮이었지만, 집은 목조 건물로 되어 있어 많은 창을 여기저기 내지는 않아 내부는 다소 어두웠다. 듬성듬성 비추는 햇빛이 전체적인 집안 구조를 비추어 주기는 했으나 곳곳이 은은하고 고요한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어쩐지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분위기 같기도 했지만, 그런 고요함마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내 방에 짐을 대충 던져놓고, 집안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 방은 현관문을 들어서면 바로 우측 편에 있었고, 그 옆으로 방문이 두 개 더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현관문 쪽에서 집안을 바라봤을 때 일직선으로 쭉 뻗은 복도 옆으로 내 방을 포함한 방들이 세 개 나란히 줄지어 있었고, 맞은편인 복도 왼편에는 화장실이 하나, 그리고 화장실 옆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주욱 이어져 있었다. 혹시나 2층에 누군가 있을까 싶어 완전히 올라가지는 않고 계단 중간쯤에서 지켜본 바, 방문이 두 개가 보였다. 1층에 방 세 개, 2층에 방 두 개. 사이트에서 미리 확인했던 방 수와 딱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다섯 명이서 사는 거구나.
공용 거실 겸 주방에 들어서서 이것저것 방 수칙과 관련된 것들이 붙어있는 게시판을 읽어봤다. 소음과 관련된 것들, 함부로 다른 누군가를 들이면 안 된다는 규칙들이 보였고 청소와 쓰레기를 담당에 관련된 글도 있었다. 게시판 옆에 있는 커다란 냉장고를 열자, 각자의 이름표가 붙은 반찬 통들이 각 칸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름의 규칙과 원칙들로 셰어하우스는 운영되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공용 기구들과 주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낯선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눈을 마주친 우리는 순간 얼었고, 잠시 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메마시떼(처음 뵙겠습니다).
"아~ 아타라시이 히토?"
(새로 온 사람?)
코가 크고 허여멀건 서양인이었다. 이 사람이 사이트에서 봤었던 프랑스인인가. 프랑스인 '오리'는 원래 프랑스에서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세계 여행의 꿈을 안고 뛰쳐나와 여러 나라들을 경험한 뒤 당시 일본에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그때는 12월이었는데, 해가 바뀌는 1월이 되면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지점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에 탑승해 러시아 반대편까지 가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했다. 말만 들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이야기에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도 그때는 어렴풋하게 일본 열도 자전거 여행을 꿈꾸고 있었기에 관련 이야기들로 대화를 이어갔다.
오리는 일본어가 유창한 편이 아니었다(이상하게 오리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음에도 형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였다). 그와 대화를 할 때면 서툰 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했는데, 생각보다 다채로운 대화가 가능하여 참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서툰 영어라고 말했지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오리는 나의 영어 실력을 늘 칭찬해 주었다. 생각보다 우리나라 영어 교육은 꽤나 체계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 편인지도 몰랐다. 훗날 인도 여행을 갔을 때에도 느낀 것이지만, 언어 회화는 어디까지나 자신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던 시절에도 어학교에서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선생님에게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일본어로 말을 걸어보려 용을 쓰며 들이대다 보니, 어느새 일본어는 자연스럽게 귀와 입에 익어 있었다. 인도 여행에서도 돼먹잖은 영어 실력이었지만, 보디랭귀지를 적절히 섞어가며 수많은 외국인들과 거리낌 없이 소통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언어는 자신감이다.
이런저런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는 막바지에 내가 한국인인 것을 밝히자, 오리는 상당히 놀란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사우스 코리아?? 그는 나의 일본어를 듣고 당연히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었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지만, 나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어학교에서 보낸 3개월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안심했다. 오리는 냉장고에서 사과 한두 개를 챙기며 나중에 저녁이 되면 모두와 함께 보자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첫 구성원과의 만남부터 느낌이 좋았다.
두 번째로 마주한 사람은 일본인 '아야카' 누나였다. 딱히 할 일이 없어 공용 거실에서 티브이를 들여다보던 와중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들어오는 아야카 누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메마시떼. 장을 봐온 각종 식료품들을 분주하게 정리하는 아야카 누나와 틈틈이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정리가 완료된 뒤에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야카 누나는 방금 전에 마주했던 프랑스인 오리와 연애 중이라고 했다. 그가 금방 떠날 줄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끌려 사랑을 나누는 커플이라니. 가슴 뛰는 이야기였다.
당시에 일을 잠시 쉬고 있었던 아야카 누나는 대체적으로 얌전한 성격이었지만,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책이나 여러 일들에 대해서는 조잘조잘 말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늘 아침에 일어나 공용 거실로 나가면 얌전히 앉아서 차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는 아야카 누나와 마주치곤 했다. 오하요-(아침 인사말). 늘 나와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내가 교토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많은 조언을 주었던 사람이다. 결국, 잠깐의 일용직 일을 제외하고는 교토에서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당시 간호사였던 '유키노' 누나는 저녁쯤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영어나 스페인어, 그리고 한국어까지 구사할 줄 아는, 언어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는 멋지고 유쾌한 사람이다. 워킹 홀리데이를 마친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일본과 한국을 왕래할 때 가끔 만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연락이 뜸해진 상태이다. 한국의 가수 2AM, 그리고 그룹 옴므에 소속된 창민을 상당히 좋아했었다(지금도 좋아하려나?).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콘서트에도 다녀왔다며 나에게 자랑을 해댔지만, 창민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나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밖에. 한국에 대한 애정이 엄청나서 처음 만남에서부터 한국인인 나를 상당히 반겨주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이 일본어를 알려줄 테니, 나에게 한국어를 알려달라며 웃어 보이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쾌활했던 누나를 따라 마을 구경을 하기도 하고, 누나가 일을 쉬는 날에는 교토 관광지들을 둘러보기도 했었다. 하루는 어느 저녁에 같이 영화를 보러 나갔던 기억도 있다. 제목도 기억 안 나는 미국 영화였는데, 들려오는 것은 영어에, 자막은 일본어여서 줄거리를 따라잡는 데에 다소 힘겨움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대화를 나누며, 어찌 되었든 영화의 줄거리를 해석해 낸 나를 보며 유키노 누나가 스고이- 하며 칭찬해 줬던 기억이 남아있다. 당시 스페인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는데(영상 통화를 했던 적이 있다), 내가 오기 직전에 내 방에 머물던 사람이었다고 누나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말하자면 나의 터치였던 셈. 두 사람은 얼마 못 가 헤어졌다. 스페인과 일본의 아득히 떨어진 거리는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열정이 넘쳤던 유키노 누나는 취미로 검도와 궁도, 그리고 펜싱까지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런 가운데 담배를 지독히 피워대는 골초였다는 점이 어딘가 모르게 만화 캐릭터와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를 그녀 역시 즐겨 읽었고, 나와는 다르게 책을 쌓아놓고 읽는 다독가였다. 특히나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있던 누나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는 도시샤 대학을 졸업해서 잘 알고 있다면서 그녀가 말할 때 놀라 뒤집어질 뻔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가했던 어느 날엔가 누나와 도시샤 대학을 찾았었지.
마지막으로 '케이타' 형은 정말이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는데, 언제나 끼니를 저칼로리 저용량 컵라면만으로 해결하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 형의 냉장고 칸은 텅텅 비어있기 마련이었는데, 가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요거트나 바나나가 채워졌다 비워졌다 할 뿐이었다. 덕분에 그의 몸매는 항상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는 채로 각자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대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여자친구와의 통화가 계속되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고서 공용 거실로 나와 이리저리 무언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거나 한참을 말없이 신문이나 읽을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키노 누나와 나는 그럴 거면 왜 통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냐며 질문을 해대곤 했다. 그럼에도 말없이 웃어 보이며 꿋꿋이 자기 할 일을 마치고 여전히 통화가 이어져있는 스마트폰을 태연하게 챙겨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곤 했던 케이타 형.
"혓바닥에 미사일을 맞은 기분이야"
하루는 불닭볶음면을 조리해서 먹다가 문득, 일본인 형 누나들이 먹으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해서 한 젓가락씩 시음을 권유했었던 적이 있다. 아야카 누나는 거절, 유키노 누나는 소리를 질렀고, 책을 읽다가 물을 마시러 잠시 나온 케이타 형은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아직까지도 저 표현을 이길 만한 붉닭볶음면 후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훗날 유키노 누나와 케이타 형은 당시에 이어져 있던 서로의 연인을 떠나보낸 뒤 사귀다가 결혼 소식을 나에게 알려왔다. 어떤 이유에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참석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결혼 선물로 커플 짱구 잠옷을 선물해 줬었다. 지금도 알콩달콩 잘 살고 있겠지.
확실히 세상은 넓었고 멋진 사람들은 많았다. 교토 생활에서 느꼈던 수많은 긍정적인 깨달음 가운데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역시 함께 머물던 사람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인생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한국에서만 뻔하게 갇혀 지냈다면 절대로 몰랐을 인생들임에는 분명했다. 다들 비슷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고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을 하는 삶이 사회 전반적으로 이어져왔고, 현재에도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퍼져있다고 느낀다. 자신의 삶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면서 흥미나 취향을 개발하여 자주적으로 삶을 쟁취해 나가는, 교토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은 유형의 인생을 국내에서는 만나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국내에서도 나의 일본 친구들처럼 멋진 사람들은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었겠지만,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접점을 만들어내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여행은 삶을 한층 더 넓은 시야로 볼 수 있게 한다. 내가 모르던, 혹은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평생을 몰랐을 삶의 방식들을 접할 수 있게 해 주고, 나 역시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런 사람들처럼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다. 교토에서의 삶은 재미도 재미였지만, 나의 인생에 있어 발전 가능성의 폭을 한참이나 넓혀준 진귀한 경험이었다. 좀 더 과감하게, 좀 더 용감하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응원과도 같은 나날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딱 교토에 머물고 있을 때쯤, SNS를 통해 개그맨 김국진 아저씨의 인생에 관한 강연 영상을 접하고 가슴 절절히 공감했었다. 롤러코스터에는 안전바가 채워져 있으니 넘어지는 것, 실패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그 롤러코스터를 즐기기 바란다는 희망찬 메시지는, 젊은 날의 나에게 깊이 와닿았다. 그 시절 셰어하우스 사람들은 그런 메시지와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더없이 즐기며 나아가며 빛을 내고 있는 사람들. 그 시절의 나는 그런 멋진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좀 더 거침없이 나아가보겠다고, 다짐을 굳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