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시 지옥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될 줄이야
2011년 11월, 당시 대한민국 고3이었던 나는 '철저한 방관자'로서 수능 시험장에 발을 들였었다. 당시에는 처음부터 대학을 목적하지 않은 채 순전한 호기심으로 시험을 치렀을 뿐이었다. 대한민국 고3이라는 타이틀이 마침내 장렬하게 불타오르는 현장 속에 나 역시 서 있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고, 나로서는 좀처럼 목표로 세우기가 껄끄러웠던 '대학'이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혼신의 힘을 쥐어짜는 친구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아무튼, 방관자로서 임했던 수능은 마음가짐에서부터 특별할 게 없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그리 선명하게 기억되지는 못했다고.
그리고 어느새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직업군인으로 지내기를 약 4년, 자전거 여행과 일본 여행을 곁들여 1년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낸 뒤, 대학 수학 능력 시험에 다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남들은 군대 전역한 이후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공부하는 데에 애를 먹는다고 했지만, 온 세상만사 고민들을 떠안고 쉴 새 없이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살아왔던 나로서는 여전히 머리만큼은 싱싱하게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수능 시험을 보기로 결심하는 데까지도 딱히 어려움은 없었다. 그저 공부를 해서 결과만을 내어 놓으면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아주 간단한 시스템이 아닌가. 시험을 잘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말은 쉽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학에 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줬었더라면, 나는 어른들이 말하는 그 적정한 시기에 수능을 치러 대학을 가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좋은 직장이나 연봉에 대해 떠들거나, 혹은 정도를 넘어선 비약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모든 낭만이 대학에 있다는 듯이 떠들어댔던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은 오히려 나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대학을 목표로 공부한다는 행위의 참된 의미에 대한 어린 청소년기 우리들의 흥미를 끌어내는 데에 정성을 들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바람에서 비롯된 아쉬움일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현실적으로 대학이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한 등용문의 기능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주입식 세뇌가 그들 나름대로의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시선으로는, 거짓된 낭만처럼 보였던 대학이었다.
대학을 목표로 하게 된 것에, 하루키의 자서전을 읽으며 작가 이력으로 한 줄 넣고 싶다는 최초의 표면적인 이유 말고도, 더 배우고 싶다는 학구열이 막연히 불타올랐던 탓도 있었다. 어설프게 글을 드문드문 써나가긴 했던 시절이었지만, 머릿속에 든 게 없으니 매번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어서 답답할 지경이었다고. 지난날의 내가 대학을 경험해보지도 않고 섣부른 판단으로 쉽게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도 한몫했었다. 인생을 지나치게 단편적으로만 보는듯한 어른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대학에 대해서 편견이 생겨나 애써 멀어지려 했었던 과거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살아가다 보니 내가 만나온 사람들 중에 꽤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굳이 졸업이라는 형태는 아니어도 자퇴나 다른 형식을 취하면서도 대부분 대학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었고, 그로 인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 편견에서 나는 조금씩 벗어날 수가 있었다. 결국 직접 가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런 여러 이유들을 바탕으로 직접 대학을 경험한 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인생에 있어 거의 대부분의 일들은, 경험해 본 다음, 혹은 실패를 맛본 다음에 다시 다른 경로로 틀어 질주해도 결코 늦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느끼곤 한다.
수능을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2017년 3월 중순, 일단 나는 요즘의 수능 시험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작년 수능 문제지를 몽땅 프린트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탐. 공부를 손에서 놓은 지 6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었기에 시간에 맞춰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고. 시간을 재지 않은 채 아는 범위 안에서 문제들을 읽고 답을 체크해 나갔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5등급에서 6등급 정도의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꽤나,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거에 치렀던 2012학년도 수능 때에는 다소 미미했던 EBS 교재 반영 비율이 6년 사이 대폭 상승했다는 점도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재수 학원에 등록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딱히 등록할 현실적인 여유가 되지 않기도 했다. 가족들과 잠시 집에서 함께 살게 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민폐는 끼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컸었기 때문에, EBS 수능 교재나 문제집을 구매하기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는 지속적으로 해나가야만 했다. 평일 오전과 오후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카페 마감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주말에는 잠시 머리를 식히거나 밀린 공부를 하는 식으로 서서히 수험생의 루틴을 굳혀 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겨움에 곡소리를 내지른다고 하는 수험생활이, 어쩐지 나에게는 즐거웠다. 생각해 보면 그 나날들 속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명확한 한 가지 목표로 나아가고 있음에서 오는 희열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에게 수험생활이 힘겨운 이유는, 스스로가 표면적으로만 원할 뿐 진정으로 원하지 않거나, 자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 이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여전히 인생에서 비틀거리는 가운데 다른 길로 나아갈 용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여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과거에 힘겨웠던 순간들을 곱씹어보면 늘 그랬으니 말이다. 앞으로 나아갈 인생에 대한 막막함에 생각의 경로가 막힌다든지, 뾰족이 떠오르는 목표가 없었을 때가 주로 나에게는 힘겨운 시기였다. 대학을 가야 할 명분이나 목적을 명확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뛰어든 수험 생활이었으니, 그것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복병은 역시나 수학이었다. 다른 과목들이야 천천히 쌓아나가면 어느 정도 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이후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할 당시에는 전교권 성적도 받아냈었던 나였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방법이나, 자세에 대해서는 경험칙에 기반한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다고. 다만, 수학은 확실히 시간을 많이 들여야만 하는 과목임이 분명했다.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이전 단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으면 결코 그다음 관문을 열지 않는 강단 있는 녀석이다. 나는 중학교 수학 문제집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실력을 끌어올려나갔다. 최대한 수학에 많은 시간을 들이려 노력했고,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수학은 무조건 하루에 한두 문제라도 푸는 습관을 들여갔다.
Boys be ambitious!
나의 목표는 서울대 철학과였다. 누군가 말했다.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고(내가 평소에 변론을 늘어놓을 때면 써먹는 말이다). 당시에는 스스로 문과적 소양이 다분하다고 생각해 문과대 중에 국내에서 가장 명망 높은 서울대를 목표로 세웠었다. 그리고 철학과라는 학과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인문학적으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고 학문적 고찰의 깊이 역시 남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의 내가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배울 수 있을 만한 학문은 철학이라고 판단했었다고.
살아가다 가끔씩 이과를 갔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이미 다분했던 문과적 소양은 잠시 내려놓고 탐구심과 모험심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는 이과 계열로 갔더라면 더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정말 아주 가끔씩 불쑥- 하고 튀어나오곤 한다. 대학에서 과제로 강제하지 않아도 문과적 소양은 알아서 찾아나갔을 테니, 오히려 일상 속에서 진입장벽이 높다고 할 만한 이과 계열이었더라면 더 풍부한 인생이 되지는 않았으려나.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수능을 출제하는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직접 관장하는 6월과 9월 모의고사는 근처의 재수학원에 응시료를 지불하고 직접 시험을 치르러 갔었다. 실제 수능 시험의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도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시험이었다. 교재비를 벌어들이기 위해 지속했던 카페 아르바이트도 6월을 전후로 그만두고 여름부터는 철저히 공부에만 전념해 나갔다. 확실히 6월보다 9월의 성적이 나아지긴 했지만, 생각했었던 성적까지는 한참 못 미쳐서 약간의 조급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서울대에서 갑자기 연세대나 고려대, 혹은 성균관대로 목표를 하향 조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처음 생각한 대로 나만의 레이스를 완주한다는 생각으로 11월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부지런히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