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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Aug 31. 2024

좋아하는지에 대한 앎

Day19 Camino de Santiago

 길을 나서며 눈에 담기는 풍경에 감탄한다. 유독 빛나는  보며 길을 나서는 순간엔 고양감을 느낀다. 눈으로만 느껴지는 이쁨, 그 이상의 감정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아침으로 채소믹스와 토르티야를 먹었다. 요 며칠 길을 걸으며 아침을 먹곤 했다. 매번 웃을 수 있어서 좋아한다. 어제 머물렀던 곳에 마트가 없는 탓에 멀리서부터 이고 온 것들을 먹으며 걷는 순간엔 뿌듯함이 느껴진다. 걸으며 아침을 먹으며 누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음이 나곤 한다. 생활력이 강한 우리가 기특해서 이겠지.


 오늘도 우리의 루틴을 지킨다. 카페 콘 레체를 마시며 길 위의 여유를 즐겨본다. 한국에선 한 번도 카페라테를 주문해 본 적이 없다. 누나는 매일 아침으로 카페라테를 마셨다고 했다. 카페에 가면 누나가 카페라테를 자주 주문하기에 따라 마셔보기 시작했던 게 며칠 전부턴 루틴이 되었다. 오전에 추위가 다 가시기 전에 야외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따스한 카페 콘 레체의 매력이 좋다. 작고 소중한 행복을 느끼는 건 중요하다며 매일 카페 콘 레체 한 잔씩 마시자고 누나와 약속했다. 열심히 약속 지키는 중이다.


 길을 가다 해바라기 밭을 발견했다. 누나가 헉하며 놀라기에 시선을 가져다 댄다. 하늘과 맞닿아있는 해바라기 떼가 눈에 가득 담긴다. 그 순간의 해와 하늘과 꽃의 색감이 완벽했다. 누나는 내가 음식을 즐기는 순간에 나를 보는 게 즐겁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에 누나를 보는 게 즐거웠다. 상대가 흥미로워하는 무언가를 응원해 줄 수 있다는 게, 그 순간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가치 있는 일이었다.


 길을 걷다 배가 고파 들어간 카페에서 빵과 오렌지쥬스를 먹었다. 빵은 하루 지난 듯한 푸석한 식감의 맛없는 빵이었다. 추천받아 마셔본 오렌지쥬스는 생과일의 느낌이 확실했지만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옆에 있는 하몽에 눈길이 가서 보고 있으니 주인장이 나와 맛보라며 한 조각 잘라내 주셨다. 충격적이었다. 스페인에 와서 지금까지 하몽을 열댓 번은 넘게 종류별로 먹어보았다. 물론 맛있었기에 여러 번 먹었다. 다만 오늘의 그것은 충격적이었다. 칼로 손수 썰어내 두께가 이전의 그것들보다 두꺼웠다. 치감이 한국에서 먹었던 신선한 뭉티기의 그것과 같았다. 살코기 부분의 강한 풍미가 입안에서 먼저 감돌고 몇 초쯤 지나면 지방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더 강한 풍미를 뿜어낸다. 환상적이었다.


 마트에 들러 점심으로 먹을 것들을 사들고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야외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는다. 순례길을 걸으며 점심은 늘 장을 봐서 먹는다. 오늘은 카페에서의 감동이 가시질 않아 하몽, 맛있지만 한국에선 비싼데 유럽에선 저렴한 프레시 모짜렐라, 유럽의 것이 맛있다는 얘기가 떠올라 사본 토마토, 늘 함께하는 쌀밥 같은 바게트와 양상추, 그냥 맛있어 보여 사온 복숭아가 함께한다. 하몽은 그 감동을 이어 주기에 부족했고, 치즈는 늘 그렇듯 자기 몫을 훌륭하게 해 주었다. 토마토는 한국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고, 오늘의 바게트는 완전 성공! 복숭아도 맛있었다. 오늘의 베스트는 바게트를 갈라 토마토즙을 짜내고 올리브오일을 듬뿍 부어 한입 크앙 하는 거.


 식사를 마치고서 누나는 낮잠을 자고 나는 혼자서 놀이터로 향했다. 누나는 내게 없는 꼬리가 흔들린다며, 마트 가는 걸 좋아하는 내가 흥미롭다고 했다. 내가 스페인어 단어 몇 개, 짧은 몇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건 마트의 덕이 컸다. 무언갈 좋아할 수 있다는 게,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에 대한 앎은 소중하다.


 알베르게에서 진행하는 커피타임에 참여했다. 오늘 머무른 알베르게는 신부님들이 봉사하시는 곳이었다. 신부님 중 한 분이 참여하시고 다른 순례자들과 둘러앉아 커피 마시며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내가 먼저 하겠다고 손들고서 떠오르는 뱉어지는 대로 뱉어냈다. 그러고서 다른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지 말 걸 하는 짧은 후회의 뒤로 그것이 또 다른 배움이었음을 알았다. 결국엔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나이고, 지나간 것은 바꿀 수 없다. 그것을 잘 곱씹고서 앞으로의 시간들을 잘 채워 나가야 한다. 다른 이의 글로서 말로써 배우는 것보다 직접 맞닥뜨리는 경험에서 느끼는 점이기에 더 귀했다.


 카드를 하나씩 골라와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길을 안내하는 표식을 골랐다. 순례길을 걸으면서는 길을 안내하는 표식이 있기에 따라갈 수 있다. 다만 삶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내가 하는 선택들이 표식이 되어준다. 순례길을 걷기로 한 것도 나의 선택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경험은 나의 선택이었다. 나의 선택으로서 나라는 인간이 구성되는 게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이탈리안 할아버지는 별똥별을 골라오셨다. 순례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이 본인에게는 별똥별과 같다고 했다. 그는 온 진심을 다 쏟아부으며 행복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그의 선량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저녁으론 냉동식품을 사 와서 조리해 먹었다. 빠에야는 익히지 않은 해산물이 들어있었다. 밥의 식감이 좋았고 빠에야 자체의 풍미가 좋았다. 저렴한 가격이었는데 기대하지 못했던 퀄리티를 마주해 버렸다.

 퀴노아와 야채를 볶은 요리는 향채를 볶아낸 기름 같은 향이 났다. 식감도 좋고 담백해서 부담 없이 맛있었다.

 야채를 구워낸 듯한 음식은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했는데도 물이 생긴다거나 하는 것 없이 맛있었다. 오븐에 구워낸 듯한 그것은 수분이 날아간 야채의 식감이 좋았다.

 즉석식품에 실망했던 터라 별 기대 없이 먹었는데 예기치 못하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해서 기분이 좋았다.


19일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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