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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Mar 10. 2024

잠자리 독립

드디어 너는 혼자 해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방은 코끝과 마음이 시린 공간이었다. 애써 손등으로 눈과 코를 비벼가며 온기를 만들어도 쉽게 데워지지 않던 따뜻함이 턱없이 부족했던 곳으로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동글동글 새하얀 새알이 둥근 쟁반에 빼곡히 들어찼다. 동짓날을 맞아 집안의 액운을 쫓기 위해 팥죽에 넣을 새알이다. 몸이 허약했던 엄마는 마음도 그에 못지않아 동짓날이면 빼놓지 않고 팥죽을 끓였다. 그래야 한 해동안 액운으로부터 자신이 보호될 거라 믿었을 테니까. 새알을 넣기 전 이미 곤로 위에서는 붉은 팥죽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동화책에서 봤던 마녀의 마법 수프 같았고 어린 누군가 마법의 완성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것만 같아 무서웠다. 다섯 식구가 먹을 양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에서 이미 나는 희생양이 될 거란 확실을 가지고 있어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예상은 항상 맞았.


나는 끔찍이도 팥죽을 싫어한다. 어린 시절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던 붉은 팥죽 앞에서 항상 그렁그렁한 눈물부터 먼저였다. 엄마가 정해놓은 각자의 양만큼 무조건 먹어야 했다. 차갑게 식어 표면이 딱딱해진 팥죽을 몇 날 며칠씩 먹다 보면 보들보들했던 내 마음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단단한 성벽을 쌓는 것 같았다.


가스 불도 없고 난방은 연탄이나 장작으로 하던 그 시절 당연히 냉장고도 귀했다. 다행인지 동짓날은 추운 겨울이라 대용량의 팥죽을 만들어도 상할 일 없으니 부엌에 딸린 온갖 잡동사니에 먼지와 곰팡내까지 가득 들어찬 작은 창고 방이 냉기를 가득 품고 있어 냉장고를 대신했다. 옷 속으로 쉽게 파고드는 겨울 냉기와 끔찍이도 싫었던 붉은 팥죽이 가득 들어찬 방. 그곳은 마치 나를 불행으로 데리고 가는 기차역의 대합실처럼 느껴져 싫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자랐다.


집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초등 저학년 때까지 남자 형제들과 함께 사용했던 곳과 부모님이 사용했던 곳. 내가 초등 고학년이 되자 엄마는 서둘러 남자 형제들과 분리해 부모님 사이에 눕혔다. 이차성징이 시작된 중학생 때는 그들도 부담을 느꼈는지 또 다른 나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한동안 집은 부산스러웠고 그 틈을 타고 차갑고 팥죽이 가득했던 창고방은 내방이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 있던 물건들이 비워낸 자리는 중학생 여자아이 몸 하나 누이기에는 적당한 크기였다. 그와 함께 오로지 내 기억에 냉기로 가득해 몸서리쳐졌두려운 마음도 고스란히 함께 나를 채웠다.


처음 나만의 공간이 생겼지만 그래서 달갑지 않았다. 장작불이 뜨끈하게 데워져 몸과 마음은 노글노글하고 수다가 끊이지 않던 오빠, 동생과 함께 사용했던 방. 엄마와 아빠 사이에 누워 거칠지만 따뜻한 그들의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좋았던 방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두꺼운 이불에 짓눌려 마음에는 딱딱한 덮개가 만들어지고 차가운 바람은 그 속으로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차던 곳은 그래서 싫었고 무서웠다. 매일매일 누군가의 온기가 몹시도 그리웠다. 아마 그때의 기억이 쉽게 잠자리 독립이 되지 않는 아들을 볼 때도 조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들의 “조금만 더요. 노력해 볼게요 “라는 말이 ”엄마, 아직은 혼자가 무서워요 “라는 말로 들렸다.


그랬던 아들이 드디어 잠자리 독립을 선언해 2주가 넘었다. 혹시 새벽에 깨 내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했으나 나의 기우였다. 아침에 일어나 꿀잠 잤다는 아들 말에 살짝 섭섭하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는 몸도 마음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지금의 내 걱정은 오직 나의 것이라는 걸 또 배웠다.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내 마음이 불안을 만들고 키우고 있었다. 정말 이제 내 마음이 자라야 할 차례다. 매일매일 성장하는 엄마. 그냥 생각만으로도 내가 좀 자란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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