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 교실
진정으로 자신만의 교육적 이념과 철학으로 똘똘 뭉쳐 마음 깊이 교사를 희망하는 사람이든, 그저 적성에 적당히 맞고 직업으로서 나쁘지 않아서 교사를 희망하든 사람이든 교사를 희망하는 자라면 누구든 분명 얼마만큼의 학생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교실에 녹아든 자신을, 교탁에 서서 멋지게 학생들을 이끄는 자신의 모습을 많든 적든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애당초 평생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심오한 고민 없이 선택한 길이었으나 그 길을 걸어가며 자연스레 학교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 학생들에게 교과서 본문에 딸린 학습 활동 문제를 풀게 지시한 뒤, 잠깐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적이 있다. 늦봄에서 초여름의 사이에 놓인 날이었다. 두꺼운 춘추복 셔츠가 조금 더운지 그 반 아이들이 열어둔 창으로 살랑이는 바람이 들어왔다. 창밖으론 게으른 꽃나무들이 흔들리고 나는 그 흔들림을 따라 눈길을 천천히 옮기고 있었다. 지극히 행복했다. 나의 지도에 따라 사각사각 문제를 열중해서 푸는 아이들. 그 고요한 교실. 이따금씩 침묵을 깨는 엉뚱하고 귀여운 질문. 그럼 나는 그 귀여움에 못 이겨 한참 웃다가 뒤늦게 엄격한 척하며 아이들을 진정시키곤 했다. 조금도 무섭지 않았을 목소리로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문제를 마저 풀라고 했다. 키득이면서 내게 져주는 아이들. 아아. 나는 그들을, 그들과 함께 했던 그곳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때의 그 무해하고 편안한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옥죄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나의 모든 지난 선택들을 후회하며 과거의 나를 질책한다. 시간을 되돌리면 내가 지닌 이 기억들도 모조리 지울 수 있을까 상상해 본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또한 내가 가진 학교에서의 경험으로 안고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아프다.
오늘은 평소보다 10분 정도 늦게 일어났다. 날이 조금씩 추워지니 침대에서 가뿐히 일어나기가 점점 힘겨워지는 것이다.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아침을 차려 먹으며 뉴스를 둘러보았다. 마음을 갑갑하게만 하는 기사들이 연일 이어지네, 생각하며 씨리얼을 먹었다. 샤워를 서두른 덕인지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출근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일들을 차례로 처리하고 우리반 아이들의 등교 상태를 확인했다. 수능이 가까워지니 아무래도 점점 얼어가는 교실 분위기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지각이나 조퇴를 하겠다는 아이들을 파악하고 출석부에 기록한 뒤 교무실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로또와 관련된 업체였다. 통화 상대인 업체 직원은 내가 로또 당첨 예상번호를 받아보는 서비스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또 스토커구나, 생각하며 내가 신청한 것이 아니니 정보를 삭제시켜달라는, 거의 내 입안에서 자동화 되어버린 문장을 표정없이 줄줄 내뱉었다. 전화를 끊고 잠깐 멍하니 있었다. 아마 또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 아이들의 입시가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전화번호를 바꿀 수 없다. 정시 추가 합격까지 모두 마감되자마자 전화번호를 바꿔야지.
나의 하루하루는 그래도 흘러간다. 내가 아무리 고여서 썩어가도 하루가 흘러가니 억지로라도 나아가게 된다. 그런 흐름에 몸을 얹어두고 시간을 이어나간다. 나의 현재와 미래가 유예되어 벌게 된 여분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결단을 내릴 용기가 없어 지속되는 삶. 이것은 분명 우울의 탓이다.
나는 그 전보다 어두운 사람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이 글을 좀 더 희망차고 미래지향적인 내용으로 꾸밀 수도 있었다. 교단에서 학생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어도 당차고 밝은 마음으로 모두 이겨내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가득 담은 가슴 따뜻한 글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나는 확신한다. 수많은 여교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도 언젠가 다시 꽃이 핀다지만 그들은 엉망으로 헤집어진 땅을 쓸고 닦아 정리할 힘조차 없을 것이다. 물기가 다 마르면 그 곳에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이내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릴 여유를 잃게 되었을 것이다. 그깟 꽃이 피든 말든 상관 없어진 채로 모든 것을 끝내고 눈을 감고만 싶을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비유를 싹 걷어내자면, 수많은 성폭력 피해교사들이 우울증과 공황장애같은 다양한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심각한 정신질환은 필연적으로 육체의 질병으로 이어진다. 나의 경우 이틀에 한 번 꼴로 체하며 종종 위경련을 일으키는 몸이 되었다. 매일 수북한 알약을 삼켜야만 겨우겨우 눌러지는 좌절감을 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생의 의지라는 말은 내게 너무 사치스럽고, 나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염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과장된 표현이라면 좋겠다. 내가 엄살을 부리는 것이면 좋겠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다.
언젠가는 씻은 듯 낫게 될 그 날을 그려보기도 한다. 예전의 해맑고 쾌활한 나로 돌아간 그 날을. 불필요한 경계 없이 교탁에 서서 아이들을 보며 화사하게 웃을 수 있는 내가 되는 꿈을 꾼다.
교사는 어쩐지 다른 직업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윤리의식(?)을 강요 받을 때가 많다. 오늘날에는 그다지 명예로운 일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도. 그 시선의 연장 속에서 성폭력 피해교사들은 더욱 상처 받고 있다. 나의 피해사실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나는 피해 발생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학교에서도 언제든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음을 폭로하고 주의를 촉구하고 싶으나 내가 교사라는 사실이 그 모든 마음을 가로막는다.
그보다 앞서 내게 폭력을 가한 학생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어떻게 교사가 학생의 앞길을 가로막는 행위를 하느냐는 말이 가장 흔하고도 높은 허들이 될 것이다. 그 학생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피해자인 내가 아니라 가해자인 학생 본인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세상에 그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세상은 여성 피해자인 나의 불행은 흥미롭게 관전하고 한편으로는 남성 가해자인 학생의 꼬여버린 사연은 안타까워하므로. 학생에게는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으며, 어린 나이에 저지른 실수이니 관대하게 대하자는 말로 교사들을 타이른다. 나는 실제로 이 말을 여러 차례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다. 내가 마치 유별나고 지독해서 학생 한 명의 인생을 망치려고 든다는 듯. 나에게는 더 이상 남은 창창한 앞날 따위가 남아있지 않다는 듯. 그저 학생을 위해서라면 나의 피해사실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듯.
얼마나 우스운가. 단 한 번이라도 성범죄를 저지른 자는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가해학생을 개도시킬 수 있는 먼지만큼의 가능성이 있다고 치자. 그 가능성이라 하믄 그 학생을 최대한 엄격하게 처벌하여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고 뉘우치게 하는 수 뿐이라 여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행위를 했으니 다시 인간으로 만드려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처벌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린 남학생의 실수(라 칭해선 안되는데도)를 어찌 그리 매정하게 여길 수 있냐며 눈물짓곤 한다. 성폭력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이들이.
이 모든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너무나 막막하기 때문에.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이 산처럼 버티고 서있다. 애초에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려면 삐뚤어진 성관념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세상의 여성혐오를 뿌리 뽑아야 하고…. 원인을 없애야겠다는 발상은 이상적이지만 이상의 이름이 이상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다못해 이미 발생한 성폭력이라도 제대로 처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무 소박하지 않은가.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다지 잘나지도 않은 학교 이름에 먹칠을 할까 두려워 벌벌 떨며 사건을 축소하기 바쁜 관리자들과 애초에 글러먹은 현행법의 조합. 사건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질낮은 언론과 커뮤니티들. 그들 사이에서 조금도 보호받지 못 한 채 점점 더 구렁텅이 속으로 내몰리는 피해자들. 글을 쓰면 쓸수록 마음이 한 중간부터 점차 늪속으로 잠기는 듯한 느낌이다. 정말 하다못해 처벌만이라도 확실해지기를 바라본다.
실은 궁금하기도 하다. 그 많은 피해교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이전처럼 수업을 할 수 있는지. 학생들을 전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래 그 뿌연 안갯속에서 망연히 서 있었는지. 정말로 언젠가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돌아갈 수 있는지. 치유할 수 있는지.
내가 쏟아내는 질문에 누군가가 답해주기를 바라본다. 아직 조금도 낫지 못 했니. 그래 아직이구나.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우리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본래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며 편안하게 지내자. 그렇게 말해주면 나는 눈물을 조금 흘리다가 이내 웃을 것이다. 그들과 서로의 손을 쓸어주며 눈을 마주치고 싶다.
너무나 사적인 나의 경험을 글로 써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이 글을 쓰는 내내 몇 번이나 망설였다. 하지만 이건 일종의 사혈이다. 다 죽어버린 나의 마음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 그래서 새로운 피가 내 몸속에 돌게 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것.
한편으로는 나의 고백이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누군가에겐 용기가 되어 닿기를 바란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캄캄한 상황에 놓인 그 누군가에게. 다시는 학교를, 학생을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좌절감에 빠진 그 누군가에게. 오직 죽음만이 이 모든 것을 끝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암울함 속에 갇힌 그 누군가에게. 그래도 우리 살아가 보자고 말을 건네고 싶어 이 글을 썼다.
우리는 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교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