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는 자라서
처음 책을 펼쳐 들었을 때의 느낌은 ‘혼돈’이었다. ‘카랑 코롱’이라거나 ‘퐁퐁’같은 음성상징어들이 이렇게까지 자주 쓰이는 글은 정말이지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처음 읽었다. 게다가 다른 클럽원분들은 이 책에서 아주 깊이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셨다고 하여, 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지고만 것이다. 직업에 의거하여 사고해온 관성 탓에 ‘카오리와 토모노리 남매, 이대로 괜찮은 거야?’같은 생각만 자꾸 들어 난감했다. 다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문학적 관점보다는 교육적 관점에서 자꾸만 지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의 메시지나 인물들의 말과 행동의 이유가 의미 있게 다가와 이전의 나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는 게 허무하고 시시한 서론의 마무리이다.
이 책은 몹시 솔직한 성장소설로 읽힌다. 아내를 자주 먹어 특별할 것이 없는 ‘카레’에 비유하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와 이러한 상황에 지친 무기력한 어머니 밑에서 나고 자란 카오리와 토모노리. 특히 누나인 카오리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시종일관 그의 들쑥날쑥하고 울렁이는 감정선에 따라 요동친다. 가끔 개연성이 부족하다 싶은 심리 전개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사춘기 소녀의 공상과 우울이 범벅된 현상이라 생각하면 그럴 듯해진다. 아무래도 그 시절엔 틈만 나면 엉뚱한 망상의 골짜기로 빠져들곤 하고 마음도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곤 하니까. 초반부, 방목에 가까운 상태에 놓인 이 남매를 보며 이들의 성장을 걱정했다. 그렇지만 불안에 대해서 ‘인간의 몸과 마음의 기능에는 그것들이 있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을 거고, 그 중 불안을 느끼는 기관은 나를 보호하는 중요한 경보 장치일 것이다.’(p20.)이라 정의 내리거나, 꿈속에서의 모험을 ‘어둠 속에서 잡초가 조용히 몸을 굽히고, 자갈을 밟으며 접근하는 내가 지나가기만을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농밀한 공기. 완전한 어둠에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면, 그곳에는 무서운 건 전혀 없고 한 걸음 앞의 세계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세계가 계속 이어질 뿐이라고’(p21.) 여기는 걸 보며 안심했다. 가장 가까운 어른들이 그들을 내팽개쳐 두었지만 그들은 충분히 잘 자라고 있었다. 불안이 인간에게 필요함을 깨닫고 삶에 필요한 태도를 습득해 나가고 있었다.
내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카오리의 내면이 조금 단단해졌다는 사인을 보내온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무라 선생에게 상담을 받으러 가 충동적인 모습을 잔뜩 보여준 그 장면이다. 카오리는 시무라 선생 앞에서 두서없이 내밀하고 사적인 가족 이야기를 늘어놓고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이는 카오리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내내 원망과 우울과 불확실함이 범벅된 채 살아온 그에게 일어난 감정과 사유의 폭발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른 채 말을 쏟아내다 ‘용서’라는 단어에 부딪친다. ‘용서한다? 스스로 뱉은 단어에 나는 위화감을 느낀다. 지금의 나라면 용서할 수 있을까? 어른이 된 지금 아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p121.)라는 생각이 카오리에게 유의미한 것은, 아버지를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붕괴된 가족형태에 대한 콤플렉스를 스스로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이어서 보여주는 모습은 더욱 고무적이다. 우울증 정도를 측정하는 테스트에서 카오리는 문항의 한계를 발견한다. 제시된 선지로는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나타낼 수 없으며, 문항 자체가 우울증 혹은 정상으로 이분하여 진단되게끔 의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이에 카오리는 사지선다형인 모든 설문에 5번을 추가한다. 카오리는 힘없는 여자아이였다. 환경과 상황에 지배되어 남동생과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상상 속 철길을 헤매던 어린 소녀는 이제 조금이나마 자란 것이다. 스스로를 설명할 문장을 스스로 써내는 행위는 이리저리 휘둘리며 음울하게 자라온 카오리가 실은 계속해서 성장해 왔으며 마침내 자신의 삶의 키를 제대로 꽉 쥔 채 선로를 개척해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이 부분을 읽을 때 그에게서 기특함을 느꼈다.)
카오리는 이후로도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완전하지만 더 이상 이불 속으로 숨어들지 않는다. 우연히 만난 아버지의 애인에게 당돌하게 번호를 알려주고 메일을 받기도 한다. 불필요하게만 느꼈던 애인을 만들었다 헤어지기도 하고 토모노리의 치정 문제(!)를 나서서 매듭지어주기도 한다. 그는 착실하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어머니가 이혼을 결심하고 재혼을 하겠다 선언했을 때, 이 가족의 뿌리 깊은 불화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들은 모두 모여 앉아 우습기 그지 없는 건배를 나눈다. 네 사람은 말미에 가서야 처음으로 함께 웃는다. 이 장면을 가족 간의 화해 따위로 아름답게 해석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아버지의 과오가 너무 거대하다. 그저 카오리가의 1막이 어떻게든 내려가고, 그가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게끔 하나의 방점이 분명히 찍혔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 태어난 아이도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으나 그 무엇도 써내려 갈 수 없어 당황했던 카오리는 하나씨와의 만남 이후 자신의 내부에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이 소설의 가장 중심에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카오리는 자신이 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제로는 뼈인 것이다. 다시금 생각한다. 그것에 살점과 이야기를 덧붙여 간다. 역사와 기억과 상상과 망상과 기원과 바람과 연상과 창조. 이야기를 이야기가 먹어 치우기도 하고 가끔 예상치 못한 비약도 발생한다’고 말한다. 카오리가 쓴 이야기의 흐름상 인간이 죽고 난 뒤 모든 것을 태우고 남는 것은 뼈라는 의미로 점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작품 전체를 보면 태초에 인간의 뼈가 생성되면 거기에 시간과 함께 여러 가지 것들이 추가된다는 점층적 의미에 더욱 가깝다. 아무 것도 없이 몇 덩어리의 뼈로 태어난 우리는 거기에 동생과 이불 속에서 속닥이던 기억과 새벽녘에 철길을 홀로 걷던 상상과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몇 점과 함께 살을 불려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 ‘나 자신’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가 된다. 토모노리에게 조언한 것처럼 ‘그건 이야기니까 자신 혹은 타인에 의한 날조의 가능성도 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그 가능성으로 인해 우리는 더 깊고 더 복잡한 이야기를 지니게 되리라.
나에게도 뼈 위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여태 그것들이 내 안에 피어올라 내가 그것들을 발견하거나 마주한 적은 없다. 언젠가 내 안의 이야기들을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나도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해보겠다.
“사실은 저 말이죠, 스스로의 센스가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 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