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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소요 Sep 28. 2022

불온한 교실 1

1. 남학교의 여교사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다. 종종 기사로 만나볼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나에게 일어났다. 그것은 내가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가해자가 그리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므로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아주 집요하고 음습한 악의가 나에게 들러붙었고, 나는 그것을 강하게 뿌리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나의 상황과 주변의 방관이 일을 더욱 최악으로 만들었다.     

남학교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교사. 나열된 단어들을 보면 어떤 인상이 드는가? 내게는 위험, 폭력, 악몽, 공황 따위의 말들만 떠오른다. 그 누구도 내게 편견에 사로잡혀있다, 시각이 치우쳐 있다고 지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나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릴 여성들이 적지 않게 존재할 것이다. 지금부터 풀어나갈 이야기는 모두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이다. 내게 닥친 사고와 같은 그 일을 모조리 꺼내어 놓고자 한다.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이 곳에 살아남아 있다고 외치려 한다.



나는 사범대를 졸업했다. 딱 중간 정도의 학점으로 졸업했고 동기들에 비해 게을렀던 것 같다. 빠른 연생이라 그런지 천성이 그런 건지 천하태평한 마음으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임용고시에 떨어졌다. 졸업 후 1년 정도 더 빈둥댄 뒤, 이대로 있다간 영영 놀고먹기만 할 것 같아서 우선 일부터 하기로 했다. 지역 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기간제 교사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나의 전공 과목에 해당하는 자리에 모조리 지원했다. 그리고 모조리 떨어졌다. 교사인 가족들과 선배들은 원래 경력이 없으면 뽑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사립학교는 여자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계속 지원하고 또 지원했다. 내가 사는 광역시를 벗어나 주변의 소도시의 학교들을 노렸다.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간제 채용 공고가 뜨기 시작하는 12월부터 1월까지 내내 지원하고 탈락하기만 했다. 그러나 몇 군데 1차 통과를 해서 면접을 보러 가기도 하고 수업시연을 하기도 했다. 

 K고교도 그 중 하나였다. (실제 학교 이름과 전혀 상관 없는 이니셜을 사용하겠다.) 서류 심사에 통과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 거의 2시간 떨어진 곳이지만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고, 연이어 거부당하기만 하던 와중 내게 내밀어진 손은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기간제 교사 카페를 뒤져 사립학교 면접 예상 질문을 찾아 리스트를 만들었다. 나름대로 괜찮다 싶은 답안을 작성해 달달 외웠다. 사립학교는 거의 사기업과 같아서 그런 예상 질문 같은 건 딱히 쓸모가 없다는 건 연차가 쌓인 뒤에나 알았다.

면접날 아침, 평소보다 몇 시간은 일찍 일어나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긴장해서 까슬까슬한 입안에 더운 밥을 쑤셔넣었다. 아빠는 왜 긴장같은 걸 하냐고 괜히 윽박을 질렀고 나는 잠이 덜 깨서 그런 것이라 둘러댔던 것 같다. 아빠가 모는 차를 타고 그 학교로 갔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고 터널을 끝도 없이 통과해서 그 소도시의 초입에 도착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그 곳은 내가 살던 곳과 달리 대부분의 건물들이 낮고 작고 낡아있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붙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지원서를 넣을 때가 첫 방문이었고, 면접날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새 익숙해진 교문으로 차를 몰아 들어갔다. 첫 방문과 달리 헤매지 않고 행정실을 찾았고, 안내에 따라 면접자 대기실에 가 앉았다. 한 시간 정도 일찍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예상 질문지를 의미 없이 뒤적거리고 있으니 다른 지원자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나이도 옷차림도 제각각인 이들이 규칙 없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히터의 훈기가 대기실을 가득 채워 숨이 갑갑해질 때쯤 면접이 시작되었다. 나는 두 명의 여성과 함께 면접을 보게 되었다. 나란히 놓인 의자에 순서대로 들어가 앉았는데, 나는 중앙 자리에 앉게 되었다. 5~6명쯤 되는 면접관들이 생각보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면접은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쉬운 질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내게는 가족들이 다 교사라 신기하다, 다른 지역 사람인데 합격하면 어쩔 생각이냐 따위를 물었던 것 같다. 그러다 유일한 여성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바지 정장을 입고 있네요. 이유가 있습니까?”

이때는 이 질문의 의미를 몰랐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젊은 여성인 내가 남학교에 바지를 입고 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나는 잠깐 버벅댄 뒤 날이 추워서 입었다고 말했다. 여성 면접관은 작게 미소 지으며 알겠다고 했다. 유의미한 질문은 한 번도 오가지 않고, 그렇게 싱겁게 면접은 끝났다. 나는 면접장을 나오며 다른 지원자들과 사담을 주고받았다. 한 지원자가 면접관이 나의 의상에 대해 언급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가요? 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신경했다. 질문의 수준을 보니 아무래도 내정자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번에도 탈락이네, 하고 아빠에게 우는 소리를 했다. 아빠는 경험한 셈 치라며 나를 달래주었고 고생했으니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날, 늦잠을 자다 깬 나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켜곤 낯선 지역번호가 찍힌 부재중 전화 기록을 발견했다. 반사적으로 전화 기록을 누르자 K고교의 행정실로 연결되었다. 합격했으니 이런저런 서류를 챙겨 언제까지 학교를 방문해 달라는 연락이었다. 나는 잠이 덜 깬 티가 날까 헛기침을 하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엄마아빠에게 달려가 방방 뛰었던 것 같다. 폴짝폴짝 뛰며 드디어 붙었다고 환호했던 것 같다. 엄마아빠는 드디어 딸이 백수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했다. 당장 자취 준비를 해야 한다며 설레발을 떨었다. 짧고도 길었던 구직 생활은 그렇게 끝을 맺었고 나는 낯선 도시에서 생애 처음 자취와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기대로 들떴다. 그때 내 나이는 24살이었다.



K고교는 다른 학교들에 비해 교사 모집을 늦게 한 편이라, 나는 몹시 급하게 자취와 채용 준비를 해야 했다. 개학까지 남은 주말이 몇 번 없었기에 주말마다 그 도시에 가서 방을 구하고 생활용품을 채워 넣었다. 그러는 틈틈이 학교에 들러 서류를 제출했다. 개학일인 3월 2일이 되기 며칠 전에 이사를 마치고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딸과 처음으로 떨어져 살게 된 엄마와 아빠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무슨 일이든 씩씩하게 잘 헤쳐나가는 편이라 불안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거의 성비가 반반인 집단에서만 생활해온 나는 남초 집단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 그 곳에 젊은 여성이 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즈음 학생에게 빗자루로 얻어맞는 교사의 동영상이 SNS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교권이 대체 어디까지 추락하는지 실험이라도 하는 듯한 시기였다. 나도 그런 것들을 두려워했다. 학생들과 5~7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행여나 나를 우습게 보면 어떡하지, 거친 아이들에게 욕설을 듣거나 맞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좀 했다. 아빠는 그래도 시골 아이들(소도시라고는 했지만 논밭이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었다.)이라 순할 것이라는 편견에 가득찬 말로 나를 달래주었다. 아빠의 말이 사실이기만을 빌며 나는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개학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첫 출근을 했다. 대학생 때 발표를 위해 샀던 투피스 정장을 입고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뚜벅이였던 나는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 아이들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웬 낯선 여자가 자신들의 학교로 들어가니 의아했던 것 같다. 그 날은 하늘도 맑았고 공기도 시원했다. 자주 신지 않아 질이 들지 않은 딱딱한 하이힐을 신고도 아픈 줄 모르고 경쾌하게 걸었다. 앞으로 펼쳐질 교직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나를 부풀게 했다. 

교무실에 들어서 교감선생님과 부장선생님들께 간단히 인사를 하고, 전체 조례를 위해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학생들이 무질서하게 체육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내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고, 가까이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보고 가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다 귀여웠다. 교감선생님의 진행으로 조례는 시작되었고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 따위의  익숙한 단계들이 이어졌다. 교장선생님께서 훈화 말씀을 하신 뒤 신규 교사들의 소개 순서가 되었다. 나는 강당의 무대 위로 올라갔다. 교복 탓인지 시커멓게 보이는 아이들이 뭉쳐 와글와글거렸다. 교감선생님이 목청껏 조용히 하라고 당부하셨지만 아이들은 그다지 따르지 않았다. 대여섯 명의 교사가 무대 위에 섰고 한 명 한 명 차례로 소개되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환호성이 터졌다. 나는 그들이 보기에 너무 어린 여성이었고, 그게 그들의 마음에 드는 점이었던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은 나의 등장을 반기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그 반응이 다행스러웠다. 

그 날의 환호성은 내가 그 학교에 근무하는 내내 이어졌다. 나는 그들이 학교를 다니며 본 교사 중 가장 어린 편이었고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성정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누나보다 어린 여자가 선생으로 등장해선 자신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웃어 넘어가 주는 것이 꽤나 즐거웠던 것 같다. 아니면 만만했거나. 만만하게 보였더라도 괜찮다. 나는 공포로 학생들을 통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편이다. 

아무튼 나의 학교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초임인 만큼 허둥대기도 하고 기존에 근무하던 교사들의 이상한 텃세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경험이다 생각하고 넘어갈 만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나를 열광적으로 좋아해주었다. 그것이 내가 좋은 교사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수업 기술이나 전공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도, 교사로서의 카리스마 등에 반한 것이 아니라 나의 나이와 나의 성별을 좋아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나를 정말 여자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 자체를 비난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 지방은 공학 학교가 유난히 적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남자 중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나이 차가 크지 않은 여성을 자연스럽게 대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와중에 내가 등장하자 그들 사이에선 작지 않은 파장이 일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곧장 선을 넘어왔다. 구글에 내 이름, 내 이름을 영문으로 바꾼 것, 내가 과제 제출을 위해 알려준 이메일, 전화번호 등 나와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는 것들을 검색해서 나의 흔적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찾아낸 정보를 공유했다. 수업에 들어가면 갑자기 번쩍 손을 들어 선생님, 대학생 때 머리가 길었던데 왜 자르셨어요? 같은 소릴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옆반의 누구누구가 구글에 치면 나온대요, 라고 태연하게 답했다. 그때까지도 아이들이 어려서 정도를 잘 모르긴 하지만, 좋아하는 선생님에 대해 이리 열성적으로 알고 싶어하다니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는 웃으며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직접 물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미 유출된 SNS 계정 이외에 새로운 개인 계정을 생성했다. 

아이들은 툭하면 쌤 데이트해요, 사귀어요, 존나 이쁘세요, 와 미쳤다 따위의 농담을 껄렁한 태도로 던졌지만 나는 반쯤 장난으로 정색하며 신고한다, 안 된다, 어머니께 이르겠다 정도로 답했다. 심각하게 그들의 발언을 교육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쁜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라 판단했고 그때는 나에 대한 칭찬도 결국은 평가라는 생각은 하지 못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별 중요치 않은 연락을 해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일부러 보지 않다가 출근 후에 답해주기도 했다. 나름대로 잘 대처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 정도는 좋게 좋게 넘어가 줄 수 있는 태도라 여겼다. 그 나잇대 남학생들의 정신적 성숙도를 과대평가한 나는, 아이들이 적당히 하다 멈출 것이라 막연히 믿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교사인데다 이 아이들보다 어른이니까. 이 아이들도 잘잘못을 가릴 줄 알 테니까. 그렇게 마음 편하게 여겼다.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아프리카 방송과 유투브를 숨쉬듯 보고 자란 세대였다. 그리고 주로 보는 방송은 말을 몹시 거칠게 하는 남성이 나와 세태-라고 말하지만 주로 여성의 면면을 까내리는-를 맹목적으로 힐난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부류의 것들이었다. 일베에서나 사용될 법한 말들을 교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친구들에게 그런 방송을 시청하고 그런 사이트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들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침없이 그 지저분한 세상에서 통용되는 저급한 말을 과시적으로 배설함으로써 이유 모를 당당함을 확보했다. 그것이 그들의 주된 정서였다. 교실은 이미 오염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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