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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와 매너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최신 과학이 밝혀낸 베풂의 의미

by 글토닥

요즘 사람들은 예의와 매너를 구닥다리 윤리관이라고 생각하는 듯싶다. 함부로 연을 맺고 끊는데 주저함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를 무시로 일관하거나 조롱 섞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 더 이상 볼 일 없잖아?"라고 생각하는 듯싶다. 나는 이런 가벼움이 삶에 있어서 오히려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이런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았다. 나는 22년부터 블로그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때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 과정 중에 예의가 없거나 무례한 사람들도 간혹 보았다.



분명 나 또한 그런 느낌을 주는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이런 행동들에 대해서 반추를 하고 예의와 매너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예의와 매너, 그리고 관계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왜 중요한 걸까?




우리는

영혼 불멸의 에너지다


우리 세상은 초연결성의 특성을 지닌다. 우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미세하게 전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초연결성은 에너지보존 법칙과 작용 반작용의 물리 법칙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불멸하다. 당신의 의식 안에는 영혼이라는 의식 에너지가 존재한다.



우리의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의식 에너지는 구천을 떠돌다가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를 전생과 환생으로 설명한다. 당신을 구성하는 물질 에너지는 소멸하더라도 정신 에너지인 영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영혼은 뇌 깊은 의식 안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육체가 깨어있을 때는 영혼을 느낄 수 없다. 육체가 잠들거나 운동을 하여 기력을 소진했을 때, 무아지경의 상태로 빠져드는데, 그때가 바로 영혼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상태이다.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영혼을 느낄 수 있는 방법에는 몰입이 있다. 몰입을 자주 경험하면 황홀경, 만족스러운 기쁨, 충만함, 기백을 느낄 수 있다.



요가, 운동, 고통스러운 수행을 하는 이유가 바로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육체의 스위치를 끔으로써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영혼의 존재를 느끼게 되면, 인간은 어떤 경지에 다다른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떤 욕망도 생기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를 " 깨달음의 경지"라고 표현하셨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로서 우리는 에너지로 존재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를 끌어당기며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 초연결성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성경의 황금률과 같다. " 주는 대로 돌려받는다."라는 진리가 성립된다. 당신이 외부에 힘을 가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돌려받는다. 이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 모두 파동이자 에너지라면 물질과 현실 세게에서 이루어지는 주고받음은 초연결성으로 인해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즉 A에게 악행을 자행한다면, A에게 돌려받기보다는 B나 C에게 악행을 돌려받는다는 무서운 결론이 내려진다. 운이 나쁜 사람은 자신이 왜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악행이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베풂을 자주 행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돌려받는다는 진리가 성립된다. ( 공자, 노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예수님, 성경, 부처님 모두 같은 진리를 설파한다. )



인간의 집단 무의식은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나의 선행과 악행은 집단 무의식의 초연결성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되돌아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집단 무의식이 반응하는 정확한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초연결성은 작동하는가? 바로 ' 감정 '이다.



카르마와 업보는 감정에서 발생한다. 타인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일을 많이 하게 된다면, 카르마는 해소된다. 타인의 고통을 해소하고 기분을 좋게 만든다면,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고 업보를 청산할 수 있다. 착한 행동은 호구 같은 짓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행동이다.



신은 선한 행동을 하는 인간을 응원하며 지지한다.



상대를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상대의 심리를 장악해 밀당을 하고 착취하라고 가르친다. 인간관계를 알려준답시고 한다는 이야기가 사람을 한 종족값에 몰아넣고 판단하여 부정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나는 그런 어설픈 처세술에 동의할 수 없으며, 선한 행동이 지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자주 한다면, 카르마는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쌓인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계속해서 덮쳐온다.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혜로운 멘토들이 침묵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하는데도 카르마와 관련이 있다. ( 말을 아낀다면 부정적 감정이 발생할 확률이 낮아진다. )



내가 뱉은 말에 상대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 그냥 한 말도 상대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할 때는 애매한 표현을 자제해야 된다. 좋다 싫다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우리가 신념과 생각을 명확하게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과 상통한다.



진정성으로 인해 상대방은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표현을 애매하게 하는 음흉한 사람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 매끄러운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좋은 영향을 끼친다.



예의와 매너는

중요하다


우리는 초연결성으로 인해 서로에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즉 A에게 베푼 선행은 다른 형태로 돌고 돌아서 B라는 사람이나 C라는 상황으로 되돌려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의와 매너를 잘 지키며 살아야 한다. 눈치를 보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올바른 행동의 기준을 세우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면서 살면 된다.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은 하지 말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라도 무시로 일관해서는 안된다. 그럼 부정적 감정이 유발되면서 카르마가 발생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상대가 기분 나빠하는 기준선을 말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상대를 조종하고픈 욕망이나. 자신이 뛰어나고픈 욕심으로 인해 상대를 조롱하거나 무시한다. 이런 행동은 결국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게 하고 되돌려 받는다.



연을 맺는 상대에게 최소한의 예의와 매너는 지키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을 잃어버린 채 상대에게 퍼주라는 말이 아니다. 선행을 베풀면서 초연해지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A에게 베풀었다고 A에게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말라는 말이다. 당신의 선행은 다시 되돌아온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억울해해서는 안된다. 선행을 베풀고 나서 깔끔히 잊어야 한다. 기억도 하지 말아라. 당신의 선행은 언젠가 다른 형태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기억하라.



당신은 배신당하지 않는다. 당신의 노력과 선함은 우주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떠한 형태로든 되돌아온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작동한다. 신념을 지키고 선함을 유지해야 된다. 예의와 매너로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자. 당신의 관심과 친절함은 싸구려가 아니다. 베풂과 친절함을 가치가 있다.



당신의 미소와 관심은 가치가 있다. 당신의 친절함과 따뜻함은 세상을 어떤 형태로든 바꾼다. 착하게 행동하는 것은 선이다. 나쁜 사람이 되어야 갑이 되는 세상에 저항하라.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초연하게 베푸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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