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영화 마니아들이 넷플릭스를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영국의 채널 4가 만들고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디스토피아 SF 시리즈 ‘블랙 미러’의 존재도 한 몫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리즈 1이 나온 2011년부터 최근작인 시즌 5가 공개된 2019년까지 ‘블랙 미러’는 언제나 새로웠고 언제나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3년째 시리즈 6을 기다리는 찐 팬인데요, 오늘은 블랙 미러 시리즈 중 SNS, 기억의 저장과 공유와 함께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 가상현실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지금은 가상현실이라는 용어 대신 메타버스로 부르지만 이 시리즈가 나올 때까지는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전이었죠. 저는 메타버스가 가상현실을 포함한 조금 더 광범위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상현실(증강현실과 혼합현실 포함해서) 더하기 게임 더히기 라이프로깅이 바로 메타버스죠. 23편의 시리즈 중 가상현실을 다룬 작품은 모두 네 편입니다. 일종의 사후세계를 다룬 시즌 3의 ‘산주니페로’는 순수하게 가상현실에 기반을 둔 작품이지만 나머지 세 작품은 게임과 결합된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1) 시즌 3의 베타테스터 :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을 가상현실에서 경험하고 싶다
가상현실 지금은 메타 버스로 더 유명한 이 기술은 두 업종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포르노 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게임 업체입니다. 블랙 미러에서는 이 중 게임에 주목했는데요, 시즌 3에서 첫 번째 VR 게임의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바로 공포 게임입니다. 게임업체가 VR 기술에 집착하는 건 이해가 갑니다. 바로 몰입도가 게임을 지속시키는 비결이기 때문이죠. 몰입도를 높이려면 현실과 차이가 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진짜 이건 게임일 뿐이야가 되는 거죠. 게임이 게임이 아닌 현실 속에 뿌리 박힌 또 하나의 현실이 되기 위해 가상현실 기술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임은 어드벤처 액션 RPG 슈팅 전략 시물레이션 등 여러 장르가 있지만 그중에서 최강의 몰입감을 제공해줄 수 있는 장르는 바로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어드벤처 게임은 일상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모험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에 가상현실 게임에 푀적화되어 있습니다. ‘베타테스터’의 게임은 바로 어드벤처 게임 중에서 가장 몰입도가 중요한 공포 게임이었죠. 일본의 코나미사를 모델로 한 게임업체가 등장해 영국 내 법인에 머물고 있는 일본인 사장이 직접 베타테스터를 골라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의 한계를 체험하도록 게임을 만듭니다. 여기서 이런 궁금증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 게임이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뭐하러 공포를 느끼러 시간과 돈을 투자할까?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공포도 오래 지속되며 쾌락으로 바뀌고 쾌락이 오래 지속되면 공포로 바뀝니다. 둘 다 역치가 있기 때문이죠. 모든 인간은 사디스트 기질도 있으면서 메조키스트 기질이 있습니다. 가학성 폭력 게임은 인간의 욕망 중 전자를 공포 체험 게임은 후자를 만족시켜 줍니다. 공포 게임 중 히트한 게임이 얼마나 많은지는 열거하기에 끝도 없을 정도입니다. 바이오 하자드, 사일런트 힐, 블러드 문, 얼론 인 더 다크 등 끝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미국의 게이머인데 영국에 놀러 오면서 사랑도 찾고 게임 베타테스터로 돈을 벌 기회도 잡죠. 그는 동의서를 작성한 뒤 이마에 특수 장비를 쓰고 귀 밑에 페치를 답니다. 특수장비는 현재도 일론 머스크가 개발 중인 BCI를 닮았는데 뇌에 전극을 연결해 가상현실을 현실처럼 느끼는 기술은 메타버스 3.0의 수준이어야 가능합니다. 소통이 가능하려면 최소 1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패치를 다는 순간 게임은 시작되고 자신의 뇌는 가상현실로 연결이 되어 가상현실을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현재 기술로는 너무나 먼 미래죠. 재미있는 사실은 시청자들은 그가 언제 패치를 몸에 붙였는지 패치를 붙인 후에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가상현실이었는지를 베타테스터의 시각이 되어 블랙 미러가 끝나고 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가상현실의 원천 기술은 여전히 머나먼 미래의 일이지만 드라마를 워낙 흥미진진하게 찍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영화 속 베타테스터가 되어 극한의 몰입감 속에서 공포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19세기 빅토리아 풍의 저택에 공포감을 느꼈는데요, 뇌와 직결된 게임기는 이를 찾아내 그에게 빅토리아 풍의 대저택으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학생의 얼굴을 두려워하고 거미를 무서워하는 아네크로포비아를 앓고 있었는데 그 둘이 결합된 가장 끔찍한 괴물이 그의 집을 엄습합니다. 그러다 이 모든 것이 음모이며 베타테스터 기가 동안 사라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며 자신을 구하러 온 여자 친구를 저택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궁금한 사실은 그녀는 이곳을 어떻게 찾았냐는 거죠. 결국 그녀 역시 게임의 일부분으로 공포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소도구였습니다. 주인공은 너무 두려워 게임을 끝내고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 엄마를 찾는데 엄마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치매를 앓고 그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극한의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쓰러집니다. 그리고 나서야 드라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뇌가 과부하 되어 그는 결국 시체가 되고 말았죠. 그가 썼던 계약서는 게임 도중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받아들인다는 각서였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각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휴지조각이겠지만 게임사는 이런 식으로 끔찍한 베타테스터를 거듭하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를 가장 밀도 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스스로 진화해갑니다. 정말 무서운 미래가 아닐 수 없죠.
(2) 시즌 3의 산주니페로 : “인간은 죽음 후에 가상현실을 통해 영생하고 싶다”
‘디지털 트윈’이란 용어가 있죠. 현실을 바탕으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사이버상에서 현실을 최대한 비슷하게 꾸미는 기술입니다. 일종의 메타버스로 엔비디아의 서비스 옴니버스가 대표적이죠. 2016년에 제작된 블랙 미러 시리즈 3편은 완성도와 예측력이란 측면에서 최고 점수를 받을 만한데, 그 시리즈 중에서 백미는 바로 ‘산주니페로’입니다. 80년데 디스코텍이라고 불리던 나이트클럽을 배경으로 한 백인 아가씨가 흑인 아가씨와 우정으로 시작해 사랑을 키워나가는 이야기인데요, 뭔가 그들이 나누는 대사가 이상했고, 그들에게서 왠지 나이가 든 사람들이 드러낼 수 있는 표정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큰 반전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12시 종이 올리면 마법이 끝나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특정 시간이 되면 서로 헤어져야 했습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백인 여성이 흑인 여성을 찾자 같은 나이트클럽의 90년대를 찾아가 보라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는 말을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게 가상현실이었습니다. 80년대에 20대를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두 여성은 실제 죽음을 앞둔 노인이었고 발달된 근 미래에서는 사람의 의식을 클라우드에 저장해 놓고 그들의 사이버 상의 의식이 자신이 원하는 시대와 장소를 골라 평생 영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두 여성 중에 한 명인 백인 여성이 식물인간 상태로 의식이 깨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죠. 그녀의 몸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고 의식도 몸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죽음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고 자신의 식물인간 상태를 종료해줄 사람으로 남자 간호사와 위장 결혼한 상태에서 배우자가 안락사를 선택하도록 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미 남편이 있었던 흑인 여성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백인 여성의 배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녀 대신에 그녀의 죽음을 선택해 준 뒤 그녀 역시 영원히 80년대의 추억이 간직돼 있는 산주니페로로 들어갑니다. 디스토피아 속에서 꽃 피우는 휴머니즘의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요? 블랙 미러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바로 산주니페로였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미래를 다룬 SF 영화들은 기억을 디지털로 저장하면서 인간이 영생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인간의 기억은 의식 그 자체는 아니죠. 의식은 기억을 넘은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뇌과학에서 의식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을 못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의식은 경험이라는 이름의 기억과 외부 감각에 대한 자극이 합쳐진 상태라고 생각하는데 이 기억과 감각을 동시에 디지털화시키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저장공간이 필요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 현재의 저장 기술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신체의 죽음은 극복하지 못하겠지만 의식과 기억이 결합된 정신적 존재로서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은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메타버스는 미래지향적인 기술이지만 다분히 복고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추억이 제일 돈 되는 콘텐츠인 거죠. 사람들은 살아서도 언제나 추억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것이며 죽어서는 영원히 추억 속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잘 드러낸 작품이 바로 ‘산주니페로’였습니다. 2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