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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r 07. 2024

사고의 원인

늦은 밤. 술에 취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와 달리 왕복 8차선 도로는 비교적 한가하다. 긴 다리처럼 이어져있는 횡단보도의 양쪽 끝은 균형이라도 맞추려는 듯 비숫한 숫자의 사람들이 마주 보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무리들은 시끌벅적했고, 동행이 없는 몇몇은 휴대전화에 눈길을 빼앗겼다.


평소였으면 흔하고 유치한 장난으로 끝날 일이었을 것이다. 버젓이 신호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건너려는 시늉을 하면 마치 조건반사처럼 따라 하게 되는 모습에서 실없는 웃음을 유발하는 그런 장난. 다 큰 어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악의가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음에도 곁눈으로는 그 사람이 보였나 보다.


질주하던 SUV의 운동량을 왜소한 여성이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설사 건장한 씨름 선수였더라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튕겨나간 여성은 주변 사람들에게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볼링핀 하나가 주위의 핀들을 밀쳐 쓰러뜨리는 것과 유사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유심히 본 사람들이라면 차량이 핸들을 꺾을 만한 잠깐의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다만 그랬다면 차가 전복되어 데굴데굴 굴렀겠지만.


렉커차, 구급차, 경찰차, 보험회사 차, 구경하는 차가 서로 엉켜 길은 길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 SUV에 앉아 있는 운전자는 너무 놀라서 그랬는지 여전히 내리지 않고 있다.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나서야 경찰에게 진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나왔는데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응급 처치가 더 이상 필요 없는 2명, 들것에 급히 실려가는 3명, 그리고 가벼운 상처 치료를 받는 사람이 5명이었다. 일행 중 사망자가 있는지 두 명이 서로 끌어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며칠 후. 경직된 얼굴을 한 SUV 운전자가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변호사가 오기 전 가벼운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가해자는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차량 자율 주행 프로그램에 인위적으로 손을 댔습니까? 로그를 분석해 보니 몇 군데 설정을 변경한 이력이 남아있더군요. 우선, 사고를 감지한 시점에서 인공지능이 빠르게 분석하여 보다 적은 피해가 발생하는 쪽을 택하도록 세팅되어 있는 것이 디폴트(Default)인데 분명히 변경되어 있었습니다. 알고 계시죠?"


"물이나 한 잔 주시겠습니까?"


"5명의 치명적인 피해자가 예측되는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자 쪽으로 핸들을 조작하게 되어있습니다. 노인과 어린이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는 차량 운전자가 미리 정하게 되어있지만요. 당신의 경우는 노인이 우선이더군요. 자식은 아직 없고 부모님은 살아 계셔서 그런 걸 까요? 으음. 다시 핵심으로 돌아가서, 이번 사고와 가장 부합되는 설정값은 바로 이거입니다."


"물은 언제 주시나요?


"'자율 주행 중 보행자와 탑승자의 안전이 동시에 위협받는 상태에서는 탑승자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 조항 잘 알고 계시죠? 면허 시험에서 항상 등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법률 항목이니까요. 그런데 그 당신의 차량은 그와 반대로 되어있었습니다. 무조건 탑승자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도록."


"목이 말라서 아무 말도 못 하겠군요."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던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를 확인하거나 신고할 여력조차 없었던 거겠죠. CCTV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목격자의 휴대전화에 당신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자율주행 프로그램 설정에 접근하려고 시도한 흔적이 남아있던데 그게 하필이면 딱 사고 직후더군요."


"모릅니다. 저는 그저 자율주행 차량을 믿었고, 누군가의 장난에 속아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으로 인해 불가피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알아서 밝혀내시고요. 나머지는 변호사가 오면 천천히 따져보도록 하죠. 아! 물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이미 벌어진 사고보다 살아있는 저의 목마름이 더 하찮다고 여기시나 봅니다. 더불어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데요. 왜 보행자의 생명이 내 생명보다 소중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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