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보폭을 맞춰 완주하기
"생일잔치가 중요해? 어차피 기숙사 반에 있었으면 외출이 안 돼서 못 가잖아."
고3 기숙사반 선발에서 떨어지고 얼마 후 친구 생일잔치에 간다는 아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때는 고3이 생일잔치가 웬 말인가 싶었다.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입시라는 문턱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그 첫 번째 관문이 기숙사반 선발 시험이었다.
기숙사반은 성적 상위 학생들을 선발해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든 시스템이다. 기숙사 반의 상위권 대학의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고등학교마다 경쟁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또한, 학교의 관리와 통제 속에서 학업에 더 집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학부모들 마음속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
큰아들이 기숙사반에 선발되면서 방학을 반납한 채 곧바로 기숙사에 입소했다. 중3의 황금 같은 방학을 기숙사에서 보내며, ‘이럴 거면 도대체 공부를 잘해서 좋은 점이 뭐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강한 현타를 느꼈다고 한다. 기숙사의 엄격한 통제와 무서운 선생님들, 낯선 아이들과 4인 1조로 한방을 써야 하는 생활까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버거웠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기숙사 반에 적응하며 큰아들은 고2까지, 2년 동안 그곳에서 공부했다. 그러다 고3이 되던 해 마지막 선발 고사에서 탈락하며 기숙사를 나오게 되었다. 아이도 우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어서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고3이라는 중요한 시기였던 만큼 불안감이 커지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생일잔치에 가고 싶다는 아들에게 나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생활 리듬이 흐트러질까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참 착한 아들이었다. 그냥 갔어도 모를 일을 내 허락을 구했고, 또 허락하지 않자 말없이 학원으로 향했으니 말이다. 학원 선생님이 아들의 속상한 마음을 알아보신 모양이었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내게 전화를 하셨다. 그분은 고등학교 내내 아들이 멘토처럼 따르던 수학학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전화를 받고 곧장 학원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그동안 지켜본 아들의 성실함과 역량을 이야기하시며, 후배 아이들의 지도까지 맡길 만큼 믿고 있는 제자라고 하셨다. 생일잔치에 다녀오는 몇 시간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그 시간에 공부한다고 해서 공부가 더 잘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할 수 있다고 차분히 덧붙이셨다. 큰아이는 목표가 분명하고 계획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잘 관리해 나갈 아이라며, 부모가 먼저 믿어주면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국, 조금 늦었지만 아이를 차에 태워 친구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잠깐의 휴식조차 마음 편히 보내주지 못하는 나의 조급함과 아들이 느낄 부담감이 느껴지며 말할 수 없는 자책이 밀려왔다.
차 안에서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아들…”
아이가 기숙사를 나와 집에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의 본격적인 ‘고3 엄마’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피곤해하는 아이를 깨우는 일도 나의 중요한 미션이었다. 가능하면 기분 좋게 깨우기 위해 애썼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몇 번 토닥이다 보면, 그제야 간신히 눈을 떴다.
아침은 소화가 잘되는 부드러운 음식으로 준비했다. 죽이나 계란, 과일주스 같은 것들이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이고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밤이 되면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학교로 가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나면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지친 몸을 씻고 침대에 누운 아들은 잠들기 전에 종종 해리포터 원서를 펼쳐 들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자.”
내 말에 큰아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 이게 쉬는 거야.”
공부를 더 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놀자니 양심에 찔려서 영어 공부하는 셈 치고 쉬는 거라고 했다.
아들이지만, 그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한 권을 다 읽으면 또 한 권을 사주고, 그렇게 전집을 모두 사주게 되었다. 그 시간만큼이나 큰애에 대한 믿음도 쌓여갔다.
집에서 통학하는 생활에 익숙해지자 아들은
“집에서 다니니까 잠을 푹 자서 그런가. 컨디션이 좋아”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나를 보람 있게 했다.
당시 아들은 비염이 심해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신경 쓴 일이 집을 자주 환기시키고, 침구를 매일 털고 자주 빨아 늘 뽀송뽀송하게 말리는 것이었다. 다행히 코막힘과 답답함이 호전되었고, 아무래도 집이 더 편안했는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아들의 체력 관리를 위해 아침마다 영양제를 챙겨 먹이고, 주말이면 보양식을 만들어 먹였다. 장이 약한 아이를 위해 매실청으로 주스를 만들어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보온병에 담아 보냈다. 공부도 체력 싸움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행히 아들은 고3 내내 체력을 잘 유지했다.
아들은 훗날 고3 시절만큼 열심히 공부한 적은 없었다고 회상했다. 기숙사반에서 탈락하며 받았던 충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는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느라 잘 몰랐고, 고등학교에서는 기숙사 반에 보내며 떨어져 지내다 보니 아이와 충분히 소통하지 못했었다. 그러면서 믿음보다는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봤던 것 같다. 고3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그제야 아이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지가 제대로 보였다.
서로 예민할 수 있는 고3 시기였지만, 아들과 나 사이는 그 어느 때보다 신뢰가 쌓여갔다. 아들을 위해 밥을 해줄 수 있어서 좋았고, 픽업을 오가며 잠깐씩 나누는 대화에서 아들의 힘든 점이나 고민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충분히 잘하고 있다'라고 응원해 줄 수 있었다.
길고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수능 날이 다가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도시락을 쌌다. 아이나 우리나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남편과 함께 아들을 수능 시험을 보는 학교 앞에 내려주었다.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우리 아들이 다른 학생들과 섞여 교문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서 있는 학부모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학원으로 출근하기 전에 성당에 들렀다. 시험을 치를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출근했다. 수업하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온통 아들에게 가 있었다.
남편은 회사 일을 일찍 마치고 학교 앞에 미리 가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다른 아이들은 하나둘 나오는데 우리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며 초조함을 내비쳤다. 기다리며 얼마나 줄담배를 피웠는지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늘 담대한 듯 보이는 남편도 그날만큼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남편과 통화하던 나도, ‘혹시 시험을 망쳐서 어디서 울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참 후 남편에게서 아들을 만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들은 제2외국어 시험까지 보고 나오느라 늦었던 터였다. 제2외국어를 선택하지 않은 아이들이 먼저 수능 장을 나오는 바람에 시험이 끝난 줄만 알았던 것이다. 아들과 만났다는 소식에 안심이 되었지만, 시험을 잘 봤는지는 선뜻 묻지 못했다.
그날따라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집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아들의 얼굴에는 뿌듯함과 해방감이 가득했고, 남편과 아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능 성적은, 아들이 만족해할 만큼 잘 나왔다. 올 1등급, 조금 취약했던 영어에서 만점을 받았고, 그해 국어 시험 문제가 어렵게 나오며 국어에 강했던 큰아들에게는 꽤나 유리한 수능이었다.
우리는 그 점수를 바탕으로 다음 선택을 고민했다. 원서는 수능 제6교시라는 말이 있다. 점수표 앞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문제를 풀어야 했다. ‘조금만 더 상향으로 갈까?’, ‘그래도 안정이 낫지 않을까.’를 수십 번 오갔다.
큰아들은 재수는 없다고 했다. 뒤이어 동생이 대입을 준비하고 있었고, 동생과 같은 학번으로 대학에 다니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큰아들은 도전보다는 안정을 택했고, 학교보다 원하는 과를 우선해 원서를 지원했다.
우리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리고 큰아들은 그해 자기가 원하는 과에 무난히 합격했다.
대학 입시의 압박에서 벗어난 아들은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나씩 시작했다. 보컬 학원과 기타 학원에 등록하고, 헬스장도 다니며 운동을 시작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열심히 놀았다. 알바도 해보고 싶다며 학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덕분에 고3 때보다 아들의 얼굴 보기가 더 어려웠다. 어느 날은 보니 너무 무리했는지 입술이 다 부르터져 있었다. 뭐든 진심을 다 하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동화 속 엔딩에 도착했다.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했답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건 걱정의 모양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일이었다.
대학이라는 큰 관문을 넘고 나니 군대를 걱정하게 되고, 군대를 다녀오니 취업을 걱정하고, 취업을 하고 나니 결혼을 걱정하며...,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ing의 삶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다음 화는 둘째의 고등학교 입학기와 대학 입시로 이어집니다.
다음 주는 명절로 쉬어가요. 가족들과 행복한 명절 보내시고 다시 만나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