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만 있고 결과만 사는
그런 삶이어야 할까?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by 교회사이


사순절 세 번째 주간 수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19)


“예수께서 . . .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 . .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 .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 . .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 .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마가복음서 8:27-35)


결론, 결말만 산다 1.jpg photo by noneunshinboo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서 1:1).


이렇게 시작한 사순절, 지금 그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총 3막으로 이루어진 마가복음서, 그 드라마는 오늘 1막에서 2막으로 넘어갑니다. 이젠 그만 그 끝으로 내달리고 싶은 욕구, 충동, 유혹이 벌써부터 있었는데, 1막의 그 마지막과 2막의 그 시작의 장면이 무거워 그냥 3막의 결론으로 그 결말로 건너뛸까 망설여집니다.


그러나, 사실 마가복음서에 3막은 없습니다. 2막이 느닷없이 끝날 뿐, 그 3막이 없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그 3막이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그 드라마의 결론이 지금 여기 오늘 지어지고 있고 결말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아직 다는 모릅니다. 그러나 힌트는 있습니다. 결론이 어떻게 지어 질지, 결말이 어떻게 날지 2막의 끝 부분에 보입니다. 그런데 2막의 그 끝은 느닷없습니다. 그래서 그 앞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앞부분의 또 그 앞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 이 무거운 장면이 있습니다. 잘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2막의 끝을, 그리고 3막이 과연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그 결론과 결말이 어떻게 지어질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3막의 출연 배우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께서는 죽기 위해 오셨다,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다고 말합니다. 반은 맞고 반은 썩 맞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우리로 인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이 땅에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아닙니다. 목적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이유이고, 우리가 ‘잘 사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당신의 죽음은 그 이유와 목적을 이루는 길이고, 그래서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죽으러 오셨다, 죽으러 그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앞과 뒤를 들어내고, 이것과 저것을 뺀 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쉽습니다. 그러나 그 말하기 쉬운 그 만큼을 넘어 위험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삶의 궤적을 흐릿하게 만드는, 당연한 듯 말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추상화, 관념화, 나아가 신화화, 신비화, 그리고 영성화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와는 먼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분의 삶으로, 성경 속 스토리로, 설교와 큐티와 성경 공부 속 예화나 일화로, 일상에서의 선택적 적용을 위한 성경 구절로, 그 정도의 거리에 나를 있게 만듭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함으로 건너뛰게 되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가 닿은 부활은 그래서 결론과 결말 이하도 이상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사건은 이미 종결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과거가 아닙니다. 그 결론을 듣고 보고 그 결말에 안도하고 기뻐하며, 그렇게 결론을 즐겁게 알고 그렇게 결과를 감사하며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고두고 내가 듣고 보고, 거듭거듭 내가 읽고 기억해야 할, 여기 오늘도 살아 있는 나의 사건이고 여기 오늘도 내가 살아내야 할 나의 기억입니다.


결론과 결말만 산다 2.jpg photo by noneunshinboo


당시 마가복음서를 읽고 듣는 그 마가 공동체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기억으로만 있고, 그래서 그 결론과 결말을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을까요? 당장 내일이라도 그들 중 누구라도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그 언덕으로 죽으러 갈 수도 있음을 너무 잘 아는 그들에게도 과연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일 뿐이고, 결말이 지어진 연극일 뿐일까요?

아닙니다. 눈 앞의 현실입니다. 선택의 길 그 앞에 선 내가 있어 현실입니다. 이거냐 저거냐, 그 갈림길 위, 우리 앞서 갔던 믿음의 선배들의 처절한 현실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것,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의 장렬한 신화적 행위도 아니고, 어벤저스 수퍼 히어로의 그 낭만적 비장미 가득한 영웅적 행위도 아닙니다. ‘이 반지가 나에게 오지 않기를 바랬는데, 왜 나에게 . . .’ 그 슬픈 프로도의 손에 맡겨진 절대반지라면 차라리 없다 할 텐데 미련 없이 버릴 텐데, 그러기엔 지금 여기를 사는 저들에겐 너무 무섭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그래서 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고 도망을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선택과 결단이 그래서 더욱 공포이고 두려움입니다.




“나는 이제 십자가를 지러 간다. 너도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와 함께 가자.”

“안됩니다. 나도, 주님도 안됩니다!”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럼 어떻게 죽는 길을 가겠습니까? 어떻게 죽는 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까?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고, 죽기 위해 사는 인생이 세상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람의 일이, 그리고 사람의 길이 사는 일이고 사는 길인데. 그게 또한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길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 사람이 살고,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살리는 길이지 않겠습니까?”


이유 있는 항변, 저항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야 할 길, 그래야 사는 길, 죽어야 사는 길입니다. 그저 상징도 은유도 일화도 예화도 신화도 영웅담도 그리고 성경 스토리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랐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한 상징적인 것만도 영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무슨 ‘척’이 아닙니다. ‘레알’입니다. 목숨을 건 믿음, 목숨을 걸고 가는 길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오늘 나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영적 의미가 아닌, 얼마나 구체성을 띈 명령으로, 맞딱트린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무겁습니다. 그 십자가, 내 어깨에 채 놓여지지 않았는데, 벌써 무겁습니다.


그러나,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마태복음서 11:28)


그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순절입니다.



* 마가복음서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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