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보입니까?
걸어 다니는 나무가 보입니다!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by 교회사이


사순절 세 번째 주간 화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18)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물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 사람이 쳐다보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 사람이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마가복음서 8:22-26)


뭐가 보이나 1.jpg photo by noneunshinboo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여전히 두고 온 빵만 생각하는 제자들입니다. 배는 부른데, 거기까지입니다. 빵의 기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기껏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고백하지만, 십자가의 길, 그리스도의 길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보았으나 기억하지 못하고, 들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 정말 답이 없어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여기 그 두 장면 사이, 사람들이 한 눈먼 사람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고쳐주십시오.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눈먼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고 물으십니다.

“무엇이 좀 보이느냐?”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 (v.24, 공동번역)




눈을 뜬다, 그리고 본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의 한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회복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외부의 자극을 내가 느끼고 받아들인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서 있는 사람인지 걸어 다니는 나무인지 구별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무엇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문제가 아니고,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진 지식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외부의 빛을 감지하는 한 감각기관으로서의 우리의 눈을 통해 우리가 얻어내는 정보는, 우리가 쌓은 지식과 앎은, 나무는 사람처럼 걸어 다닐 수도 뛰어 다닐 수도 없고, 사람은 나무처럼 땅에 박혀 꼼짝을 않고 그 자리에 붙박혀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 정도입니다.


우리의 얇고 얕은 그 ‘본다’ 그리고 그 ‘안다’ 함은 사람은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고, 바람을 결코 잠재울 수 없다는 정도의 수준에 우리를 계속 머물게 합니다. ‘유령이다!’ 외치며 혼비백산, 두려움에 떠는 것 외에는, 그 두 눈 부르뜨고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를 맞서 제대로 보려는 시도조차 감히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자리에 꼼짝을 못하고 얼어붙어 있거나, 저 멀리로 도망을 치거나 할 뿐입니다. 안개가 걷히고, 파도가 잠들고, 바람이 그치면 그 모습 드러나려니, 혹 내가 볼수 있으려니, . . .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분이 나를 지나쳐 가신지 오랜 후.


여전히 나에겐 물 위를 걷는 유령으로 남아 계실 그분은 슬퍼하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나무가 걸어 갔다고 여길 저들로 그분은 몹시 슬퍼하십니다.


뭐가 보이나 2.jpg photo by noneunshinboo


그래서, 그분, 주님이 다시 내게 손을 얹으십니다.


나는 다시 보아야 합니다. 나의 두 눈 부릅뜨고 다시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보는, 파악된 사실 그 너머를, 우린 유령이 아닌 물 위를 걸어 내게로 오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령이 아닌 우리도 물 위를 주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동료 베드로가 어설프지만 그 물 위를 아기 걸음마 수준의 몇 발자국이나마 내딛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내 물에 빠졌음을 알지만, 그래도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어떻게를 알고자 하는 것, 보는 것, 아는 것, 그리고 믿는 것, 그것이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고, 나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줄곧 밖으로만 향하던 눈과 귀를 그리고 마음을 나의 안으로 그리고 거기 나의 안에 계신 주님을 향하게 할 그때,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듣고 그래서 나의 속 깊은 마음으로 알고 그리고 속 넓은 마음으로 믿을 그때, 주님이 다시 내게 손을 얹으시는 그때, 그 뜨거움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그때,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믿는 그때, 나의 어둔 눈이 풀리고 막힌 귀가 풀리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 풀리고, 그래서 나의 그 앙다문 입이 풀려 고백이 터집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입니다.


이 가로막은 벽 뚫겠다 뚫고, 깊은 거기로 들어 가겠다 들어가고, 그 보이는 것 듣는 것 그 너머를 보겠다 듣겠다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선은 내가 눈 감고 귀 막고 마음마저 닫은 나인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걷는 나무다 신기하다 하고, 저기 물 위를 걸어 내게 오시는 주님을 보고 유령이다 너무 무섭다 하며, 여기 그냥 머물던지. 그것도 아니며, 아예 뿌리 없이 걸어 다니는 나무, 안개 속 헤매는 유령으로 살던지.


“유령이다!”

“아니다, 나다. 유령이 아니다. 나를 보지 못하고 서로를 보지 못하는, 너희가 되레 그 유령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라.”


두 눈 부릅뜨고 걷는 사순절입니다.


* 마태복음서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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