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비아 조 Sep 19. 2021

퇴사한 프랑스 회사에서 복직 제의를 받기까지 1

두 번째 만남 곽경혜

<일하는 파리지엔느> 인터뷰 프로젝트를 하기로 마음먹고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인터뷰이를 모집하는가였다. 학생인 내 곁에는 온통 학생들로 가득했고 그것도 영화과 학생들로 가득했다. 최대한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성 분들을 소개하고 싶었기에 결국 인터넷의 힘을 빌리게 되었다. 프랑스에 사는 한국인 중에서 '프잘사'라는 네이버 카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곳에 프로젝트의 취지를 밝히고 인터뷰이를 모집한다는 글을 올렸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분들이 프랑스를 떠났던 때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줄지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프로젝트 취지에 공감해 주시고 연락을 주셨다. 그중 가구회사에 재직 중이신 곽경혜 님의 프로필이 눈에 띄었다. 가구회사라니? 프랑스 특성상 패션, 뷰티, 예술 산업에 재직 중이신 분이 많았기에 가구 회사에 재직 중인 곽경혜 님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경혜님과 내가 파리에서 가장 애정 하는 카페 Partisan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카페 Partisan 커피는 물론 말차 쿠키도 꼭 드셔 보라



한국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하셨는데요. 저에겐 생소한 분야라 어떤 전공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교수님들 자부심이 대단해서 도시공학은 제왕학이라고 했었어요. 옛날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학문들이 모두 집합한 학문이기 때문이에요. 지리, 역사, 법, 설계, 수학, 심지어 철학도 배웠어요. 1-2년 살 공간이 아닌 100년을 넘어갈 공간을 미리 앞서서 계획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힘이 들기 때문이에요. 조금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도시 학계론, 도시 계획의 역사, 측량, 조경, 설계, 수학, 물리학 등을 배웠어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그만큼 힘들었지만 재밌었어요. 


대학교 재학 당시 중국 톈진에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는데 어떻게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가시게 된 건가요?


전공이 재밌긴 했지만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시험 기간 때 삼일 동안 밤을 새우고 집에 와서 잠옷으로 갈아입다가 그대로 잠든 적도 있어요(웃음). 그렇게 2년을 보내니깐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너무 지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모부가 있는 중국에서 1년 동안 휴식을 취하면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모부가 있는 도시에서 멀지 않고 베이징보다는 저렴한 곳을 찾다가 톈진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많지 않아 언어를 배우기에도 좋았어요. 당시만 해도 많이 발달이 되지 않아 날것의 중국을 경험할 수 있었죠.


그때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살아 보신 건가요? 


맞아요. 해외에서 산다는 것이 좋고 나에게 잘 맞는구나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에요.


1년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인데, 어학연수를 마치고 더 남고 싶지는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웃음). 그때는 베이징 올림픽 전이라 중국이 많이 낙후되어있었거든요. 당시 제가 지냈던 한국인 기숙사는 톈진 학생 기숙사 중에서 가장 비싼 기숙사였는데도 전기를 사서 썼어요. 사람들이 처음 들으면 놀라기도 하는데 카드 충전하듯이 전기를 미리 충전해서 쓰는 거예요. 충전량을 다 사용하면 알람이 계속 울리고 전기가 바로 끊겨요. 한 밤 중에도 그런 일이 생기니깐 '아 한국이 좋구나' 계속 상기가 됐죠.




프랑스에는 어떻게 처음 오게 되신 건가요? 


복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던 중에 여름 방학에 유네스코 봉사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프로그램을 통해 프랑스 시골에 3주 지내게 됐어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너 다시 프랑스 올 거야?'라고 물으면 ‘어 나 유학하러 다시 올 거야’라고 이야기했었어요. 


저도 생각해보면 본격적으로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기 한참 전부터 막연히 유학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유네스코 봉사 프로그램은 어떤 프로그램인가요?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에서 이런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서 각국의 청년들이 교류를 해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프로그램이에요. 한국은 유럽은 아니지만 참가 자격이 있어요. 참가를 하게 되면 미션을 받는데, 제가 맡았던 미션은 Vesoul이라는 조그만 프랑스 동쪽 마을 공원의 돌담을 쌓는 일이었어요. 독일, 한국, 터키 등 여러 나라에서 모인 열 명이 한 팀이 되었었죠. 남쪽이라 굉장히 더웠기 때문에 아침 7시에 일어나 시멘트와 전용 장갑, 수평계 등을 챙겨서 돌담을 쌓기 시작했어요. 3주 동안 열심히 돌담을 쌓으면 다음 해의 참가자들이 나머지를 이어서 쌓아 완성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체력 소모가 심했을 것 같은데 힘드시진 않으셨어요? 


힘들지만 재미있었어요. 7시에 시작해 더워지기 전인 11시 반쯤 일을 끝나고 나면 자유 시간이었죠. 끝나면 다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각자 돌아가면서 음식을 준비했었어요. 오후에는 마을에도 놀러 가고 다른 캠프에 놀러 가기도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다양한 외국 사람들과 두 눈을 보고 대화하며 인간관계를 쌓았던 것 같아요. 


그때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 유학을 오시게 된 건가요?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까맣게 잊고 지냈어요(웃음).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 바로 도시 계획 해외 사업팀에 취업을 했죠. 그런데 저희 팀이 유독 알제리에서 진행하는 사업이 많았어요. 알제리는 불어를 쓰잖아요. 제 오랜 꿈 중에 하나가 국제기구에서 일을 하는 거였는데 그 일을 하면서 그 꿈이 점점 되살아난 거죠. ‘내가 불어를 배우면 도시 계획 전공을 살려 국제기구에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당시에 회사에서 힘든 일도 있었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그땐 미생에 나올 법한 일들이 제법 많았어요. 건축 엔지니어링 회사라 극 남초 회사기도 했고요. 당시 저는 도시 계획부라는 전체 인원이 140명 정도 되는 큰 부서에 속해있었는데 여성 직원은 7명밖에 없었어요.


예상은 했지만 정확한 수치를 듣고 보니 충격적이네요. 


그땐 어떤 때였냐면, 임원 사무실에 중요한 손님이 오면... 


커피? 


맞아요(웃음). '~씨 여기 커피 한 잔만' 이렇게 말하면 자연스럽게 커피를 탔었죠. 그때는 지금처럼 페미니즘이 떠오르지 않은 시기라서 잘못됐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오히려 당시에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남자 동료들이 상사의 얼토당토않은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른 다는 거였죠.


예를 들면요? 


다음날이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팀장이 일이 많다고 팀 전원에게 다음 날도 출근하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팀 전원이 출근을 했는데 막상 팀장이 연락이 되지 않는 거예요. 팀장에게 보챌 수도 없으니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결국 4시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죠. 큰일이 났던 것도 아니고 전날 회식에서 과음을 했던 거예요. 그 상황에서 남자 직원들은 궁시렁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 많은 직원들을 4시까지 기다리게 해 놓고 나타나 아무 사과도 없는 팀장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프랑스에서 살 기미가 보인 거죠(웃음). 그래서 그 일에 대해 항의를 했는데 그 후에 소위 말해서 찍힌 거죠. 구석 자리에 책상이 보내지고 2-3개월 동안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지 않고 일도 시키지 않았어요.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이네요. 하루도 버티기 힘드셨을 것 같은데 그 시기를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벌을 받고 있던 다른 여자 직원분이 있었거든요. 그 분과 네이트온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 


그분은 어떤 이유로 찍혔던 건가요? 


그분은 제가 회사에 들어왔을 때 이미 찍혀있었어요(웃음). 그렇게 그 분과 네이트온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다른 팀에서 저 둘은 왜 저러고 있냐는 말이 돌기 시작한 거예요. 다른 팀에서 우리를 챙겨주기 시작했고 눈치가 보인 팀장이 다시 일을 주기 시작하면서 흐지부지 됐어요.


힘이 되신 분이 있었더라도 그 많은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계시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 퇴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요? 


당연히 굴뚝같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끝맺음을 잘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만두더라도 기다렸다가 제 자리가 돌아오면 그때 그만두라 하셨어요. 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 제 위치로 돌아온 후 유학 준비를 시작했죠.



다음 편에 계속




인터뷰어 조소희 

파리 8 대학 영화과를 졸업한 후 단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인터뷰이 곽경혜 @kate.in.paris

프랑스 생활 11년 차.

파리 4 대학 도시계획학 석사 졸업. 

현 오스트리아 가구회사 Bene의 프랑스 지점 운영책임자(Operation Manager)




사진 출처

배경 사진 <Ses souvenirs>, Peichen Chi

Partisan 전경 사진, 구글맵 

두 번째 사진, 곽경혜님 제공

이전 04화 세계 2위 럭셔리그룹에서 인턴 하기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