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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아메리칸 드림

        나의 오래되고 헛된 희망 중에는 런던, 뉴욕, 도쿄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  패션 피플도 아닌 내가 왜 이 세 도시에 살아보고 싶다는 원인 모를 결심을 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런데 90년대에 제일 핫 한 도시였던 건 분명하다. 1년 학비와 기숙비만 들고 떠났던 영국 유학. 쉐필드라는 지방에서 공부를 했지만 인턴쉽을 런던에서 하게 되면서 소원 하나는 이룬 셈이다. 


        다음은 뉴욕이라 생각했고, 2학년을 마치고 미국 인턴쉽을 가자고 계획한 건 영국을 떠나기 전부터였다.  한번 사는 인생.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미국에서 한번 살아봐야 되지 않을까요? 미국으로 갈 거예요."라는 말을 2년 내내 달고 살았다. 영국인 친구들은 죽게 되더라도, 총 맞아서 죽기는 싫다며 미국에서 사는 건 싫다고들 했다. 설마 내가 진짜 미국에 가겠냐며 주변 지인들도 그냥 하는 말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나에게도 계획이란 건 없었다. 그냥 막연히 가보고 싶다는 나의 바람 정도였을 뿐. 당시 세계 경제는 엄청난 침체기에 모두가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미국에서의 취업은 성사될 것 같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체인 호텔그룹에서 유럽에 있는 대학들을 돌며 호텔 인턴쉽 인재들을 뽑는 채용 박람회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 뉴욕이 나오길 손에 꼽아 기다렸지만 레스토랑 외에는 잡 오프닝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볼티모어 메리어트 호텔에서 리쿠르먼트 스케줄이 생겼다. 인터뷰도 연습이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던 터라 볼티모어에 갈 마음이 1도 없었던 나는 연습차 인터뷰 신청을 했다. 


          아이러닉 하게도 나를 면접 본 사람은 워싱턴 디씨에서 온 식음 디렉터였고 나는 런던에서의 경험을 최대치로 발휘하여 "아, 내가 됐구나" 하는 확신이 들만큼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최종 합격. 볼티보어로 웨이터/웨이트리스로 가는 영국인 친구들과 같은 조였는지 알았는데 운 좋게도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의 메리어트 호텔에서 이벤트 슈퍼바이저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 갈 거라고 입에 달고 살았던 내가 진짜 미국에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짜 갈지 몰랐다며.... 연고 없는 영국의 유학생활도 혼자 개척했는데 미국은 영어권이니 뭐가 다를까 싶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빨리 학비를 벌어야 했던 나는 2학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딱 3일의 휴가 뒤 머나먼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으로 떠나면서의 내 마음가짐은 생뚱맞게 미국의 치과 선생님과 사랑에 빠져 결혼이라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했지만 그런 일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은 영국과 너무나 달랐다. 영국 발음도 알아듣기 힘들어 고생했는데, 그 발음에 익숙해질 때쯤 미국으로 건너가니 더 알아들을 수 없었고, 뇌는 풀가동되지 않았다. 


        당장 집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내가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가격과 입주날짜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주면 끝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오픈 데이를 열어 그 집에 입주하기 희망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면접을 진행한다.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확인하고, 근무 시간, 재정상태를 확인한다. 미국은 모든 게 문서화, 시스템화 확실하게 운영되는 나라였다. 


         다행인 것은, 호텔 측에서 도착 후 2주 동안 무료 숙소를 제공해주는 것이 계약조건이었지만,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내가 집을 구하는 3개월까지 호텔방을 제공해주는 은혜를 입었다. 한국에서 영국 그리고 다시 미국. 얼마나 큰 꿈을 안고 멀리 떠돌아 온 건지… 아메리칸드림을 꿈꿨지만 현실은 집 없는 인터내셔널 고아로 호텔방에서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낯 섬이 주는 기대와 설렘, 적당한 초초함과 무서움은 나를 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내 두 발 뻗을 곳을 찾으러, 온 도시를 헤집고 다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내 뉴욕은 아니지만  나름 미국의 수도 아니냐는 위로를 삼으며 나의 미국 생활은 시작되었다. 워싱턴 디씨는 흑인들이 많은 도시이다. 내가 일했던 호텔은 백악관에서 몇 블락 떨어진 곳이었는데 운인지 일복인지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였다. 그리고 그해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당시 워싱턴 디씨의 오바마 지지율은 70-80프로에 육박할 만큼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많은 곳이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행사를 진행하는 컨벤션 호텔에서 나는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많았고, 잉글랜드 지방에서 흑인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사실…. 조금 당황하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 그리고 신비한 인체의 세계. 3개월이 접어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스타벅스의 빵으로 끼니를 떼었던 시간도 끝나고, 죽을 만큼 배가 고프니 식욕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해졌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보스와 동료, 팀원들과 누구보다 가까워졌고 즐겁게, 사랑받으면서 존중받으면서 일했다. 물론 혹독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 


        그리고 미국에서는 팁 문화여서 내가 잘하면 그만큼 돌아오는 곳이었다. 런던에서 일할 때 보다 더 생글생글 잘 웃고 상냥한 서비스를 제공했고, 노력한 만큼 돈으로 보상받았다. 그토록 꿈꿨던 아메리칸드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꿈꿨던 뉴욕 여행을 세 번이나 했고, 라스베이거스, 마이애미, 시카고, 보스턴 등 미국 도시 여행을 수도 없이 다니며 다시없을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한 달.. 영국으로 돌아가는 디데이 30일. 동료들의 서운한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눈치 없이 매일 같이 내가 떠날 날을 카운팅 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면 계속 일할수 있다고, 학교도 미국으로 편입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어느새 영국에 정이 들었는지 내 고향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떠나 보니, 그곳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많은 걸 남겨두고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미국에도 영국의 그것처럼 꿈같은 시간들과 아름다운 사람들을 남겨뒀다는 걸 집으로 돌아와서야 깨달았지만, 떠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나는 그다음 꿈을 꿀 수 있게 된다.  


자, 이제 도쿄에서 살아보자는 꿈을 도모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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