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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온 우주가 도와준다

         나는 공상가이자 망상가이다. 내가 원하는 삶과 현실적인 삶의 괴리감이 너무 큰 탓에 무기력한 10대를 보냈지만, 천성이 여리고 나쁜 짓이나 무모한 짓을 할 만큼 도전 정신이 강하거나 용감무쌍하지 못했다. 

그래서 방구석에서 이불을 덮고 공상을 즐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수많은 공상 중에 한결같이 믿었던 것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지금은 모 대통령 탓에 우스운 말이 돼 버렸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이 말의 증거처럼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구체적인 계획이라는 건 애초에 없었다. 그냥 오랫동안 내 마음과 생각이 닿아 있으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 근처에서는 서성이던 나를 대면하는 일이 많았다. 일 년 학비만 들고 떠난 영국 유학에서 일 년 마치고 휴학을 한다는 건 당연히 내 계획안에 있는 일이었다. "1학년 마치고 휴학하고 런던가서 돈 벌고, 2학년 마치고 휴학하고 미국 가서 돈 벌고 마지막 학년을 마친다."가난하고 비루한 유학생의 재정 계획은 사실 이게 전부였다. 


        열심히 공부했고, 158군데 이력서를 뿌려 어렵사리 런던의 4 스타 호텔 인턴쉽에 합격했다. 부단한 노력으로 겨우 사귄 영국친구들과 헤어지고, 조별과제에 눈치 볼일 없어져 좋아했던 것도 잠시, 돈 벌러 런던으로 가야 되는 내 신세가 조금은 처량했지만 내 계획안에 있던 일이라 괜찮다고 위로했다.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인턴 나부랭이 따위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배웠는지 알아야 되지 않냐며 식음료 부서 디렉터에게 한 달에 한번 면담을 신청했다. 공부하는 감을 잃을까 봐 시키지도 않는 리포트도 작성에서 읽어보라고 했다. 일 년이 지나면 학교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겁대가리가 없었던 것이다. 에메랄드 눈 색깔을 갖은 이 북아일랜드 식음 디렉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하였지만 아등바등 거리는 나를 꽤나 기특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어느 날은 3단 카트에 조식에서 먹은 접시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누구 하나 치우는 자가 없었고, 내가 그 카트 위에 접시를 살포시 얹었을 때 300여 개의 접시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시 디렉터가 화가 잔뜩 나서 분노의 표정으로 누가 이랬냐며 호통을 쳤지만, 내가 그랬다고 하자 끝내 화를 내지 못했다. 값비싼 호텔 접시로 막대한 손실을 냈지만, 평소의 행실로 식음 디렉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나는 어떤 처벌없이 너그러이 용서받았다. 


          그렇게 1년 노가다 생활을 끝으로 2학년 학비를 지불하고 학교로 복귀. 이제 3학년 학비를 내기 위해 또 한 번의 노동 생활이 시작됐다. 158번의 거절을 받아본 터라 나의 면접은 순조로웠고 놀랍게도 정말로 미국에 가게 되었다. 초기 생활비가 없던 나는 영국을 떠난다며, 1년간 일하면서 성실하게 부과했던 세금을 환급받아 미국 가는 비행기표를 끊고 초기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1년간 미국에서의 노가다를 마쳤을때는 예전처럼 미국 세금을 환급받아 3학년 학비와 생활비에 보탰다. 하지만 나는 예나 지금이나 허세가 작렬하여, 다시 미국에 올 기회가 있겠냐며 떠나기 전, 뉴욕이며 LA, 라스베이거스, 플로리다. 시카고, 보스턴 여기저기 여행을 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의 방탕한 여행 생활은 대학교 마지막 학년 마지막 학기에서 벌어졌다. 나에게 마지막 학비가 없었던 것이다. 


        스산한 영국, 쉐필드의 작은 방에서 지독스러운 외로움과 절박함을 느꼈다. 돈이 없었다. 끼니를 때울 돈도 없었다. 굳이 돈이 아니더라도 이미 졸업논문으로 피똥 쌓고 있던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독과 절망감을 느꼈고, 혹한의 추위만큼이나 마음도 외로웠다. 


          겁이 많은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상상도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죽는 사람들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뇌구조의 소유자였다. 감당할 수 없고, 경험해 본 적 없는 수준의 우울감에 빠지자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는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우울감은 다행히도 내 겁 많음을 이겨낼 수 없었고, 불현듯 영국 은행에서 -실수로 발급했을지도 모를- 한도 5천 파운드의 신용카드가 떠올랐다. 이자는 12프로에 달했지만, 매달 최소 이자만 갚으면 원금을 모두 갚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나의 지인으로 남아있던 언제나 자비로운 J 언니는 런던에 사는 다른 한국인 지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런던 장학금 “이라는 명목으로 천 파운드에 가까운 돈을 보내주었다. 이자는 없고 나중에 원금만 갚아 달라고 했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언니의 지인들은 내 신분 확인도 없이 “이국에서 열심히 사는 유학생” 이란 말 한마디에  소정의 금액으로 응원을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개념 없이 신용카드로 마지막 학비를 지불하고 언니들이 보내준 돈으로 생활비를 쓰고 졸업논문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당시 나의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은 고작 논문 첫 페이지 Special thanks to에 이름 몇 자 올려드리는 것뿐이었다. 


나에게 최고의 한도로 신용카드를 오픈해준 로이드 뱅크의 이름 모를 은행원과 영국과 미국의 세금 환급  제도에도 깊은 감사를 표한다. 찰나의 지독한 외로움으로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우주의 기운”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다. 


이 세상에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

그러니까 끝까지 열심히 살아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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