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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워크인 프리지

        “끝이 뻔히 보이는 사랑을 왜 해? 너는 곧 떠날 거야. 정신 똑바로 챙겨” 유달리 풍성한 머리숱과 정확한 발음. 남달리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내 주변에서 가장 고학력자이자 인텔리였던 룸메이트 언니가 한심하다는 듯 나에게 쏟아 부친다. 언니의 이 말은 내 모든 연애사 곳곳에서 비석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이미 한차례 큰 홍역을 치룬 나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터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언니의 충고였으리라..


        나 좋다고 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길을 걷다가도, 펍에 들어가도, 나 좋다는 남자들이 넘친다. 나보고 이쁘단다. 한국에서 평생 못 들어 본말들을 원없이 들어본다. 내가 앞으로 평생 살 곳은 이곳인가? 여기가 천국인가? 처음에는 좋았지만 해외생활 2년 차에 접어들자 여자면 다 좋아하는 적극적인 남자들이 동양에 비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제와 말이지만, 20대 초반에는 그냥 젊다는 이유로 다 이쁘다는 사실도 10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 남자. 진한 곱슬머리에 짙은 보조개 빨간 니트가 잘 어울리는 이 남자의 다정한 눈길에는 피할 재간이 없다. 언젠가부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뻣뻣해지고 뭔가 부자연스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활화산 같은 그의 눈빛에 내 온몸도 타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는 재경부의 코스트 어디터(cost auditor)이다. 이벤트를 마치고 빌링을 마무리하면 공유 오피스를 지나 그의 책상을 지나야만 빌링 박스가 나온다.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다가도, 그가 보고 싶기도 한 나는 어색하게 또 그의 앞을 지난 간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이쁘게 입고 왔는지. 다른 여자와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 묘한 질투를 느낀다. 


        나는 사내 연애를 지양하지 않았던가…하지만 그의 뜨거운 눈빛을 느낀 이후로 그는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왜 나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잘생겼다. 이런 촌스러운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 포스에 오뚝한 콧날, 섹시한 턱선, 숯댕이 같은 짙은 눈썹. 180 더 돼 보이는 키. 모든 게 완벽하다. 재무 감각이 없는 나에게 딱 어울리는 남자다.


        금요일 오후 자연스레 술자리를 합석하며 온라인 친구를 맺고, 개인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조금 더 가까워졌다. 지난치게 계산적이던 나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계획하고, 환한 웃음을 건넨다. 징글징글한 회사 생활에서 한줄기 빛. 이렇게 훤칠한 남자가 -누가 봐도 잘생긴 남자가- 나를 좋아하다니…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듯한 아니 나도 그만큼 한 미모를 하는 것 같은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느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지만 세 번만 찍어줘도 땡큐 베리 감사했던지라 두 번만 더 나를 찍어주기를 조신히 기다렸다. 한 달에 한번 있는 물품 재고조사에 나는 손을 들어 자원했다. 모든 재고를 카운팅 해서 정리하고 입력하고 이미 판매한 숫자와 맞아떨어져야 되는 일은 주임의 역할이었지만, 너그러운 매니저를 자처하며 이쁘게 화장하고 그를 기다렸다. 물품 재고조사라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이었나…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류 수량을 파악하러 워크인 프리지를 들어갔다. 차갑게 보관해야 되는 수많은 주류들 때문에 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큰 냉장고인 워크인 프리지에서, 수도 없이 많은 주류를 일일이 카운팅 하며,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줬다. 선반 맨 아래칸에 있던 주류를 카운팅 하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을 때는 한뺨 더 가까워졌다. 사내연애는 질색이었지만 그만한 활력소가 있어나 싶을 만큼 회사 생활은 즐거웠고 어떤 컴플레인이나 갈등, 첼 런지에도 유하게 처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달달한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었고, 어차피 우리는 헤어진다” 는 비석 같은 이 말과 끝이 뻔히 보이는 결말은 나를 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내 마음의 생채기는 오롯이 내 몫이고, 나는 이미 한국을 떠날 때도, 미국을 떠날 때도, 다시 런던을 떠날 때도 수많은 이별을 겪지 않았나…


 나는 워크인 프리지만큼이나 차갑게 그와 헤어졌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서 알게되었다. 


끝이 보이는 사랑은 없다는 걸...나는 그저 뜨겁게 사랑 하지 못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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