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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58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한결같이 58킬로의 몸무게를 유지했다. 미국에 가서 미국 음식을 먹고살 때 아주 잠깐 60킬로를 육박했지만 내 평생 몸무게이자 희망 몸무게는 58킬로이다. 내 키에 58킬로는 아주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여자 몸무게에 대한 개념이 없기에 남자들이 뭐라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우리 집에서도 내가 아빠보다 더 많은 몸무게가 나갔지만 단 한 번도 몸무게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 본적이 없다.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누가 봐도 나는 날씬했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엄마가 고깃집을 시작한 후 고기를 끊었고 군것질이나 기름진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때 살구 맛 쿨피스에 미쳐서 잠깐 종아리 살이 트긴 했지만 심각하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인들이 왜 이렇게 늘씬하냐는 말을 하다가도 내 실 몸무게를 듣고는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 이내 아, 뼈가 뚱뚱한가 봐요라고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한다. 


         엄마는 매일같이 9첩 반상을 차려주셨는데 거나한 저녁식사가 마무리되면 나는 곧잘 바로 누워서 티비를 봤다. 외할머니는 ‘그러다 너 소 된다고’ 하셨지만 내가 소가 되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에서 잡을 구해 이벤트 매니저로 첫 커리어를 쌓았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심지어 아쿠아 에어로빅도 하면서 잘 지냈는데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2주 사이에 무려 3킬로나 빠졌다. 외국에 살면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아픈 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조금만 컨디션이 안 좋아도 쉬고 나를 보살펴 왔건만… 


         사실 나의 건강염려증은 영국의 낙후된 의료 체계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모든 게 무료이긴 하지만 의사를 만나는 게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같이 살던 폴란드 친구가 실내 테닝을 하러 갔다 바이러스에 걸려 다리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는데도 의사 선생님을 보려면 2,3주를 기다려야 됐다. 그녀는 사람들 많은 병원에서 바지를 내려 썩어 들어가는 허벅지를 만인에게 보여준 이후에나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동갑내기 한국 친구는 길을 건너다 블랙캡에 치여 발가락이 무서졌는데 얼음찜질팩과 페인킬러(pain killer) 알약으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미국이라도 나을 건 없었다. 하우스 메이트가 원인모를 복통으로 응급차를 탔다 천 달러의 빚을 갚아야만 했으니.. 


        아프면 방도가 없는 곳인데, 나는 왜 살이 자꾸 빠지는 걸까.. 3주를 기다려 어렵게 만나 영국의 의사 선생님은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채변 채취를 제안 주셨다. 수면 내시경은 어불성설이었기에, 채변 채취를 통해 헬리콥박터균의 유무만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크게 아픈 곳은 없었지만 원인은 알 수 없었고, 그 뒤로 나는 줄곧 55킬로의 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이벤트팀의 부서장이 되었다. 열심히 일했다. 처음으로 내가 보살펴야 될 직원들이 생겼고 나보다 더 큰 덩치의 사내들을 그것도 20대 후반의 남자들을 핸들 할 수 있을까 내심 무서웠지만 그것은 내 기우였고 구수한 부산 사투리를 쓰며 나를 살갑게 대해주는 그들이 너무나 좋았다. 당시 나는 친구들로부터 직원들하고 연애하냐는 핀잔을 곧잘 들었다. 좋은 곳을 가도 맛있는 것을 먹어도 우리 팀 아이들이 제일 먼저 생각났고 뭐든지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몸과 마음은 고돼도 그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픈한 지 2년이 지나도 우리 호텔은 왜 이리 장사가 잘되는지 쉴틈이 없었다. 매일 같이 이벤트가 반복되었고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가 열리던 어느 날. 내가 믿고 의지하던 대리 둘을 불러 밤 10시에서야 전략회의를 가졌다. 적은 매닝으로 많은 행사를 쳐야 했던 터라 우리는 말 그대로 전략이 필요했다. 머리를 맞대고 효율적으로 일할 방도를 찾아 플랜을 세웠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는 게 이벤트라 경력직답게 플랜 B, 플랜 c 도 세웠다. 듬직한 우리 팀.. 몹시 노곤하고 피곤했지만 용맹하고 늠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날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호텔 앞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을 때라 가족을 부를 수도 없었고 119를 부를까 잠깐 생각하다 1층에 상주하고 있는 우리 건물주 아저씨의 도움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이라는 곳은 정말 피를 철철 흘리고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면 기다려야 되는 곳이라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젊은 인턴 선생을 만났다. 나의 상태를 물었고 나는 몹시 어지러워 일어설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엑스레이와 CT를 찍었지만 이내 정상으로 판명되어 잠시 쉬다가 내발로 일어나 스스로 병원을 걸어 나왔다. 나의 상태는 며칠간 못 먹고 못 자서 생긴 영양실조 비슷한…. 21세기에 부산 최고로 럭셔리한 호텔에서 일하는 매니저가 영양실조라니… 


         그렇게 나의 몸무게는 51킬로가 되었다. 영국에서 만난 지인들이 호텔에 나를 보러 왔을 때 그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58킬로에서 51킬로가 됐으니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내 꼬락서니의 몰골에 놀라울 수밖에… 이내 나는 나를 아는 모든 이의 걱정거리가 되었고, 날씬해서 좋겠다는 말보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을 더 많이 들어야만 했다. 


        의학적으로도 알 수 없는 내 살 빠짐의 원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회사에서의 내 타이틀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나는 살을 잃었다. 3 단계의 점프로 무려 9킬로를 잃었다. 

회사를 위해서 일하지 말자. 나를 위해서 일하자가 월급쟁이로서 내 마지막 자존심이였것만 녹록지 않은 회사 생활의 슬기롭지 못했던 이 직장인은 월급 인상과 승진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목을 매고 일을 하다 51킬로의 여윈 몸무게를 갖게 된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 달려왔을까? 잘하고 싶은 내 욕심의 끝이었나? 왜 그렇게 잘하려고 애썼을까? 내 노력의 정당한 대가를 받기는 했을까? 월급 인상과 진급이 몸무게와 바꿀만한 가치가 있었던 걸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마 더 열심히 일했으면 했지 게으름을 피우거나 안일하게 굴지는 않았을 거다. 그건 내 유전자가 그렇고, 나는 그렇게 생겨먹어서 어쩔 수가 없다. 디렉터가 된 지금도 부당하고 억울하고 과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맡은 일에는 책임감을 갖고 성과를 내려고 끝까지 노력한다.  예민하게 집착하고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은 다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먹고 먹고 움직이지 않아도 예전의 내 몸무게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살을 찌우겠다는 목표보다는 더 이상 빠지지 않고 이대로 유지하는 게 더 현실적인 목표일 것이다. 

끝맺지 못하고 있는 제목 58킬로 편의 행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킬로수에 연연하지 않고 51이던 58이던 양호한 건강상태를 유지하며, 어쩔 수 없는 일은 조금씩 내려놓기로 다짐해본다. 


        그리고 내가 호텔 총지배인까지 올라갈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내 노력과 야망의 부족이 아니라 더 이상 빠질 나의 살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자리에 크게 욕심 내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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