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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더 레드밀

          “키미, 월요일은 허브, 화요일은 레드밀, 수요일은 코퍼레이션이야, 목요일은….” 

허브? 레드밀? 코퍼레이션? 중심지? 제분소? 회사? 도대체 무슨 말이지? 목요일 뒤로는 아예 알아듣지도 못했다. 팀 발표에서 좋은 아이디어로 내 몫을 내기 시작하자 아싸에서 인싸가 되었다.  88년생 영국 대학 친구들의 뜬금없는 관심에 몸들 바를 몰랐지만 집-학교-도서관만 다니며 지루한 유학 생활을 영위하던 나에게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스무 살이 넘어 나의 가장 오랜 된 욕망이자, 가장 큰 후회이자,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동네에 까진 언니들, 한때 까져본 언니들이었다. 까지다는 지나치게 약아서 되바라진 자들을 일컫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적 허영심 강한 문학소녀를 자처하던 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용감한 분들. 유난히 겁이 많은 나는, 나쁜 짓 한 번을 해본 적이 없고, 스무 살이 넘어서도 클럽 한번 가본 적이 없는 순진하고 나이브한 아가씨였던 것이다. 평생 일탈을 꿈꿨지만 그런 용기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한참이나 어린 친구들의 클럽핑 제의는 Dreams Come True 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허브, 레드밀, 코퍼레이션은 내가 살고 있는 쉐필드에서 제일 잘 나가는 클럽 이름들이었던 것이다. 이 아이들은 요일마다 가는 클럽을 정해놓았는데 이유인즉 그날 그 클럽을 가야 입장료나 음료가 할인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들 돈 없는 학생들인지라 요일마다 저렴한 클럽을 쫓아다녔던 것인데, 매일매일 다른 클럽을 다닌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였다. 


         동양인은 서양인에 비해 나이가 적어 보이는지라, 그들은 내가 본인들보다 8살이나 많은지 알지 못했고, 내 오래된 욕망을 실현해 보기로 했다. 서양인들의 특징은 학교는 정말 생얼에 평안하게 입고 다니면서 클럽에 가면 못 알아볼 정도의 과한 메이크업과 과한 의상을 차려입는다는 것이다. 과연 동일 인물이 맞나 할 정도로.. 그런데 요즘 말로 개 멋있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과감하게 입어보고 싶었다. 


         영화제에서 연예인 김혜수가 입을법한 복장으로 나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섹시미를 과시하며, 아아 라인도 2센티는 족히 두껍게 그리고 새로운 나로 변신해보고 싶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지 않았나. 영국친구들한테 뒤지지 않으려면, 더두껍게 그리고 더 과감한 의상에 도전해야 했지만 그러기에 영국은 너무나 추웠다. 여전히 남아있는 미스터리는 그들은 추위를 안 타는 건지, 섹시해 보이기 위해서 추위를 감수하는 건지 정말 알고 싶었다. 


        내가 런던을 가면서 희망했던 것 하나는 여자의 변신뿐이니라 나의 변신이었다. 나를 모르는 이억만리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새롭게 살아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내가 부러워하던 캐릭터로 탈바꿈하고, 전혀 다른 나로 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나의 27년 만의 첫 클럽행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돈이 없는 탓에 매일같이 쫒아다니지는 못했지만 나의 선택은 레드밀과 코퍼레이션이였다. 들어서자마자 사운드와 분위기에 압도당해버렸다. 가난한 유학생은 언제 돈을 써야 되는지, 잘 모를 때라 입장료를 내면 주는 웰컵 드링크 한잔으로 3시간을 연명했다. 그리고 이내 제정신으로 노는 데 한계가 있었는지 자유롭게 내 몸을 음악에 맡기지는 못했다. 놀아본 사람이 논다고 가슴을 쿵쿵 울리게 만드는 클럽 전용 스피커에 살짝 흥분되기는 했지만, 미친 듯 놀 수 있는 알코올 흡수를 충분히 하지 못했던터라 정신은 너무나 말짱하고 뻣뻣한 내 몸뚱이는 궁중과 함께 부대끼며 온전히 나를 내려놓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영어노래를 완벽히 따라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해본 최초의 YOLO의 삶이었고, 복세편살이었다. 한 번뿐인 인생.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는 사람들의 라이브 버전.  그렇지만 나는 다음날 과제가 더 걱정이었고, 한잔에 3파운드 하는 술값에 벌벌 떨었다. 1파운드가 1만 원 같았고, 5파운드로 일주일을 버티면 살던 나에게, 술을 마시는데 돈을 쓰는 건 사치였다. 고향에 있는 어미 생각까지 잠시 스치다 보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즐기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요일마다 다른 클럽을 다니며,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퍼마시고, 야밤에 고성방가를 불러데는 용기(?). 마흔이 넘은 지금도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그건 그저 나의 워너비 삶으로, 까져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그냥 욕망으로 남아 있기로 했다. 


지구 반 바퀴에 놓여 살아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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