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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파워포인트

          영국 대학의 커리큘럼에는 과목마다 일주일에 한 번의 강의와 한 번의 세미나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의는 대강당에서 학부 학생들 전체가 참여하여 듣는 수업으로 부담이 없었다.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한시간의 일방적인 수업을 알아듣는 척하다가, 과제를 놓치는 일만 없으면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세미나 수업이다. 10-12명의 소규모 수업으로 이뤄지는 이 세미나 시간에는 발표와 토론 이 자유롭게 주어진다. 원어민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고통의 순간이자,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잉글랜드 지방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 보니 영국 학생들이 90프로 이상이었고, 몇몇의 중국인과 나는 그중에서도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나보다 어린 영국 대학생들과 있으면서, 나의 영어 수준은 50-60프로만 이해가 가능했고 설사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배경지식이 전혀 없기에, 왜 그 이야기에 울고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보다 8살이나 나이가 많았지만 8살 더 어린 사람의 숫기를 가져서 말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세미나 시작 30분 전이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배가 아프다거나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는 일이 반복됐다.  

총 6과목의 세미나가 있었으니 6번은 배가 아파야 일주일이 끝나는 것이다. 


         신생아처럼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아 있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고 저 영국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내 자존감보다 더 압도했다.  다행이건 그룹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아서 영국인이나 중국인들 틈에 끼여 조금이라도 팀에 기여하며 과제를 이어 나갔던 것이다. 중국인들 하고 할 때는 내가 대장이 되어 모든 걸 진두지휘 해야 했고, 영국인들하고 할 때는 시키는 것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단독 과제가 생긴 것이다. 교수님께서 각자 다른 논문을 주면 그 논문을 읽고 그 취지와 의미를 나의 해석으로 발표해야 되는 과제였던 것이다. 영국 아이들 앞에서 혼자 발표를 해야 되다니… 


        과제가 떨어진 순간부터 극심한 스트레스가 시작됐다. 아프다고 할까? 포기할까? 아쉽게도, 비겁한 건 천성이 허락하지 않아 이내 나는 나에게 주어진 논문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페이퍼가 너덜너덜 해지는 순간까지 읽었다. 그때 구글 자동번역이 있었으면, 그토록 읽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발표 4주 전부터부터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됐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하고, 윈도우 무미 메이커로 논문에 나오는 예시를 뮤직 비디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유창한 영어로 설명할 수는 없기에 비디오가 효율적이라 생각했고, 시작할 때 보여주면 시선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영상도 만들고 파워포인트의 모든 액션과 애니메이션 기능을 삽입하여 내 메시지를 채워 나갔다. 혹시라도 내가 헛소리를 할 까봐 같이 사는 영국인 집주인 할머니 앞에서  내 말이 이해가 되는지 들어 달라고 부탁도 하며, 발표 리허설도 해보는 열의를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결전의 날… 지난 한 달 동안 세미나에서 말 한마디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던 영국 아이들과 교수님은 걱정스러운 눈빛과 예의 그 사이 어디쯤 에서 내 발표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설픈 영어로 또박또박 나의 발표를 이어 나갔고 내가 만든 영상은 예상대로 모든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사실 내가 밥을 먹어도 그들보다 2,920일은 더 먹고살았는데, 그들보다 나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발표였다는 찬사를 받았고, 그 과목에서 무려 The First Class를 받았다.  이제 더 누구도 나를 무시한다거나, 조별과제 때 짝이 없어 전전긍긍해야 되는 일은 사라졌다. 무엇보다 나의 능력을 믿는 자신감 1+의 상승


그런데 내가 그 발표로 크게 깨달은 건 영국을 떠나 한국으로 귀국한 한참 후였다.  


          당시 나는 그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저 내가 바보같이 보이는 걸 극도로 혐오하며 끝끝내 불안감을 떨쳐내는데 실패했었다. 완벽하고 논리적인 문장과 생각이 아니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그들은 그저 페이스북과 인스타의 사이버 친구로 전락해버렸고, 그 보다 더 많은 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생사 파악 조차 알지 못한다. 왜 그렇게 남의 시선에 갇혀서 스스로를 감옥 속에 살게 했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지나고 보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을…. 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처럼 힘들어했는지….


          나는 그때의 그 파워포인트 발표로 얻게 된 게 너무나 많다.  자격지심과 인종차별로 시작된 당시의 내 노력과 의지는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저들보다 못하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으로 파워포인트 스킬과 비디오 메이킹 스킬이 향상 되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다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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