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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쟁이 Oct 24. 2021

머리숱

        풍성하고 건강한 머릿결을 자랑하던 내가 어느 순간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어서 그렇겠지.. 요즘 스트레스받아서 그렇겠지… 샴푸가 안 맞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건만, 어느 순간 눈에 띄게 머리숱이 적어졌다.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것은 이제 겨우 열네 살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무게의 짐이고,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이다. 


      백혈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어디가 아픈 것 일까? 삼류 멜로드라마가 판을 치고 세기말 전 분위기가 감돌던 1990년대의 나는 뜬금없이 여느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된다. 이 여주인공은 나약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우연히 부잣집 도련님을 만나 마음 깊은 곳의 복합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도련님 엄마에게 헤어짐을 강요당한다는 단순하고 유치한 전개가 진부하게 흘러가다가 개연성도 없이 백혈병에 걸려서 죽는다. 신물 나는 클리쉐. 나는 아직 부잣집 도련님 얼굴도 구경해본 적도 없는데 생뚱맞게 머리카락이 빠져서 왜 이 상상 속의 삼류 드라마 여주도 못된 걸까. 

       

        나의 머리숱은 엄마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됐고, 외할머니의 걱정거리가 됐다가, 급기야 우리 집의 걱정거리가 될 정도로 나날이 심각해졌다. 머리숱의 절반을 잃은 후에야 뒤늦게 병원에 가서 건강검사를 받았다. 나는 백혈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아픈 것 같기도 하다. 아직 15년도 못살아봤는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억울하고 원통했다. 조신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삼류 멜로극을 찍던 나는 휴먼다큐로 장르를 전환하고 어떻게 엄마를 위로해주면 좋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의 건강수치는 모든 게 정상범위 안에 있었다. 조금의 빈혈 수치가 있었지만 아픈 곳도 없고, 처량하게 머리카락만 오지게 빠지고 있었다. 원인은 알 수가 없단다.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엄마는 크게 안도하셨고 집안의 걱정거리는 사라졌지만, 나는 나날이 빠져가는 머리카락만큼 자신감도 잃었고 대인기피증이 생길 만큼 사회성도 상실됐다. 그 꽃다운 나이에 나는 소중한 머리카락을 잃었다. 머리를 감을 때도 빗질을 할 때도 한 올 한 올 소중한 내 머리카락이 하나라도 더 빠질까 봐 노심초사 세상 소중하게 다뤘다. 모든 사람들이 내 머리카락만 보는 것 같았고, 저 여자애는 왜 머리숱이 없냐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모두 나만 보는 것 같았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그 시절 나는 머리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어보았다. 머리카락을 잃은 나에게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엄마는 현대 의학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현대의학, 한의학 급기야 공인되지 않는 민간요법까지. 나를 위해서라면 굿이라도 할 판이었고 본인의 머리카락까지도 내어줄 기세였다. 예민하고 까탈스럽던 내가 혹여나 먹지 않을까 봐 거짓말까지 하시며 건네줬던 수많은 약들.. 그중에는 만병통치약으로 입소문이 나 불법 유통되던 사람의 태반을 약재로 만든 환까지 구해다 주셨다. 좋다는 건 다 해봤지만 내 머리숱은 많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고깃집 막내딸은 어디가 많이 아픈 딸로 소문이 났다. 그렇게 나는 머리숱 없는 처자로 나의 20대를 맞았다.  


       동네 탈출이 인생 목표였던 나는 비단 동네만 탈출한 게 아니었다. 원대한(?) 꿈을 안고 싸우스 코리아까지 탈출해서 런던이라는 꿈의 도시에 내 두발을 놓였다. 신기했다.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던 횡단보도 앞에서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인종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내 귓가에는 모국어가 아닌 잉글리시가 들린다. 누구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무슨 깡이고 무슨 패기였는지 무서운 두려움보다는 낯 섬이 주는 설렘으로 밥을 굶어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아무도 내 머리숱에 대해 코멘트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유럽에는 대머리들의 천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최 영어를 알아들을 수없으니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가 들릴 일이 만무하지 않는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는 어느 때보다 용감했고 못 알아들을 때마다 세상 친절한 웃음으로 어색함을 때웠다. 패기와 상냥함은 내 무기가 되었다. 


        방값을 아끼려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한국 언니와 방을 셰어 했는데 언니는 내가 만난 최초의 서울 사람으로 대원외고를 거쳐 서울의 모 유명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유달리 머리숱이 많은 엘리트였다. 언니는 나와 사는 동안 ‘ 너는 진짜… 너처럼 커먼 센스가 떨어지는 애는 처음 본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머리숱도 없는 애가 기본 상식까지 떨어진다고 베베꼬여서 받아들였을 말이지만, 당시 나의 행복지수는 핀란드 국민과 동일한 수준이었기에 상식이 없다는 언니의 핀잔에도 서글프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먹다 남은 라면 국물을 버리는 건 사치였고, 버터 올린 삶은 감자로 끼니를 때워도 일주일 내내 토마토 파스타를 먹고살아도 행복했다. 사회성 결핍으로 친구도 많지 않던 나에게 진짜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그들은 나의 머리숱을 걱정해주지 않는 이 우주에 유일한 친구들이었다. 


          아기 돌봄 비자로 크로아티아에서 온 자나라는 친구는 유독 나와 죽이 잘 맞았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땡땡이를 치고 벤지스라는 싸구려 커피숍에서 몸짓 손짓을 해가며 수다를 떨었다. 내가 사는 경상도에서는 자나라는 게 are you sleeping?이라는 뜻이라고, 실없는 농도 쳤다. 남자 친구와 헤어져 세계가 멸망한 듯 폭풍눈물을 흘린던 브라질 친구는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클럽에 가서 새로운 남자를 만났다. 머리숱이 없어진 이후로는 사진 한 장도 찍지 않았던 내가 그 친구들과는 수천 장의 사진을 남겼다. 런던에서 가장 큰 왕립 공원인 리치먼드 파크의 명물. 사슴 무리를 보면서 예쁜 척, 귀여운 척, 청순한 척 온갖 척을 해가면서 사진을 찍었고 나는 곧 그 사진 몇 장으로 엄마에게 안부를 전했다. 


        엄마가 나에게 당부한 한 가지는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라는 거였는데 아픈데 없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뿌듯했을 엄마를 생각했건만 전화기 넘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 너…. 런던 가서 가발 쓰고 다니니?’ 그렇다. 나의 친어미도 못 알아볼 만큼 어느새 나는 건강하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가발이 아니고 내 진짜 머리카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는 처음으로 안도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머리카락에 좋다는 약은 모조리 구해줬던 나의 어미 아닌가… 


          런던에 와서 갑자기 머리카락이 낫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엄마와 나는 지난 10년 탈모의 역사를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책을 읽다가도 내용과는 무관하게 머리숱 없는 등장인물에 깊은 연민을 느끼며, 탈모로 자신감과 사회성 결핍이라는 가장 큰 두 가지를 잃지 않았나.  원인 모를 탈모를 겪었고 원인 모를 양모를 얻었다. 유럽의 수돗물에는 석회질이 들어있어서 유럽 아줌마들이 발목이 두껍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 양모의 원인도 석회질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다가도 유럽에 대머리들이 유난히 많은 걸 보면 석회질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내 머리카락만 보는 것 같고 내 머리숱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 같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걷어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는 친구를 얻으며 상실된 사회성을 회복하고 온전히 내 의지데로 원하는 삶을 개척할 때 비로소 나는 머리카락을 얻었다. 나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이 있어서 이렇게 허울 좋은 말들을 나열하지만, 사실 이 말에는 설득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솔직하고 현실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머리카락에 관해서는 절대 안일하지 굴지 않는다. 


소중한 걸 잃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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